밤이 되면 종이 울려요. 소등종이에요. 종이 울리면 타라인은 등불 하나 켤 수 없어요, 사냥터를 몰래 넘보는 밀렵꾼처럼 보일까 봐서요.
스카타나 들판 어딘가, 순찰대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던 타라 유랑민 둘이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창고 쪽에서 불이 났고, 순찰대는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죠. 두 사람을 묶은 밧줄을 몰래 잘라준 건, 이름도 밝히지 않은 낯선 와이번이었어요.
핀과 셀몬은 이 여자를 그냥 '착한 의사'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이 여자, 사실은 자기 이름조차 제대로 말한 적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 여행의 끝에서, 이 여자의 정체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반군 조직의 뿌리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1. 소등종이 울리던 밤, 이름 없는 방화범
장사꾼 핀과 성격 불같은 셀몬은 순찰대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창고에 불이 났어요.
순찰대가 불을 끄러 몰려간 사이, 낯선 여자가 다가와 핀의 밧줄을 잘라줬어요. 핀이 물었죠, 넌 누구냐고.
……넌 누구야?
— 핀
……어서 가.
— 리드
늪지대로 도망친 뒤에도 여자는 곁에 남았어요. 핀은 이 여자를 '의사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여자는 자기가 의사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어요.
밤 아홉 시가 지나면 라디오도 방송을 멈춰요. 소등종 이후엔 아무 소리도 안 나거든요. 그런데 이 여자, 스카타나 들판에 와본 적이 있다면서도 '그때는 이런 소등종 규칙은 없었다'고 하네요.
여자가 조용히 묻습니다, 사람을 죽인 거냐고. 셀몬은 순찰대 둘을 죽였다고 순순히 인정해요.
다들 이 여자가 그냥 평범한 떠돌이 의사는 아니란 걸 눈치채기 시작하죠.
2. 의사도 아닌데 의사 행세, 그리고 수상한 옛날 시집
다음 날 아침, 핀이 빵을 나눠주려 했는데 여자는 타라의 옛 시가집을 읽고 있었어요. 핀은 타라 문자도 모른다며 머쓱해합니다.
핀이 고맙다고 하자 여자는 '로도스 아일랜드와 한 약속을 지키려면,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중얼거려요. 핀은 잘 못 들었다며 그냥 넘어가고요.
한편 트렌트 카운티에선 검사 첸과 빅토리아 군인 출신 백파이프가 등장해요. 이 둘은 '귀혼대'라는 정체불명의 무리를 쫓고 있었어요.
그런데 첸이 갑자기 얼어붙습니다. '용문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면서요.
귀혼대는 힐록 카운티에서 목격됐던 이상한 복장의 무리예요. 첸과 백파이프는 조심스레 그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합니다.
3. 짐마차를 털던 날, 옛 전우와 재회하다
핀 무리는 식량이 떨어지자 짐마차를 털기로 해요. 그런데 셀몬이 굳이 더블린 흉내를 내며 나서죠. 핀은 화를 냅니다, 네 사심 채우려고 다들 위험해지는 거냐고.
그리고 너의 이기심도…… 싫어. 그거야말로 가장 큰 거짓말이야.
— 리드
리드는 셀몬을 조용히 타이릅니다. 하필 그 짐마차엔 첸과 백파이프가 동행하고 있었어요. 셀몬이 진짜 귀혼대 행세를 하며 검을 뽑자, 백파이프의 캐슬브레이커가 날아듭니다.
혼전 중에 백파이프는 어디선가 본 듯한 창을 든 와이번과 마주쳐요. 서로를 확인한 순간, 백파이프의 눈이 커집니다.
……리드?
— 백파이프
놀랍게도 둘은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로도스 아일랜드 소속 오퍼레이터라는 사실도, 이 순간 자연스레 드러나죠.
4. 안전가옥의 밤, 건초더미와 그리운 옛집
리드는 백파이프와 첸의 도움으로 유랑민들을 안전가옥까지 데려가요. 텐트와 응급 물자도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구해다 줍니다. 다만 셀몬은 끝내 '난 더블린으로 돌아갈 거야'라며 등을 돌리고요.

밤, 백파이프는 리드를 건초더미로 끌어들여요. '건초 냄새가 좋다야, 맞나?' 시답잖은 잡담이지만, 리드는 여기서 처음으로 무너진 자기 옛집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니는 니랑 관련된 얘기를 할 때만 '아니'라는 말을 많이 한다니. 마치…… 무언가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만 같다니.
— 백파이프
리드에겐 언니가 있대요. 하지만 그 이상은 말끝을 흐립니다.
대신 조용히 답해요, 누군가 나한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그 사람이 나를 살렸다면서, 왜 살렸는지 아직도 묻고 싶다고요.
5. 모란이 합류하고, 죽어도 걷는 병사들을 만나다
저는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제 다리가 아직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당신들과 함께 걷고 싶어요.
— 모란
야맹증을 앓는 감염자 모란이 리드를 따라나서요. 이동 중, 유랑민 무리가 정체불명 병사들과 마주칩니다. 리드가 살펴보니 전투 흔적은 있는데 시체가 하나도 없는, 아주 이상한 전장이었어요.
백파이프와 첸도 비슷한 걸 힐록 카운티에서 본 적이 있대요, 눈에서 불이 피어오르던 병사들을요.
리드가 낮게 답합니다. '그건…… 망령이야, 분명 죽었지만 안식에 들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
그때 몸을 숨기고 있던 셀몬이 나타나요. 병사 무리 중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한 거예요.
……오빠.
— 셀몬
6. 그림자 자매의 오래된 약속
셀몬은 몰래 오빠를 쫓아갑니다. 이 년 전, 오빠는 신발 밑창이 다 떨어진 채로 더블린을 찾아 떠났었거든요. 셀몬은 뒤따라가려다 도망쳤던 과거를 떠올려요.
그리고 아주 오래전, 눈 내리는 명절 밤 이야기가 겹쳐 떠오릅니다. 자매가 있었어요. 언니는 뭐든 잘 해냈고, 동생은 늘 언니 흉내만 냈죠.
동생은 언니 목소리를 흉내 내 아버지에게 부탁해봤지만, 아버지는 금방 알아챘어요. '당연하지, 자기 딸들도 구별 못 하는 아빠가 어디 있겠니.'
그날 밤, 자매는 집을 잃었어요. 언니는 동생 손을 잡고 낯선 문을 두드리게 했죠.
'가,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널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렇게 자매는 은인의 서재로 숨어들었어요.

은인은 두 사람에게 창을 쥐여줬어요. 언니는 그 창으로 서슴없이 정적을 해치웠지만, 동생은 매번 손이 떨렸습니다.
괜찮아, 동생아. 네 욕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우선 내가 되도록 해. 미래에 너와 난 모두 '리더'가 될 테니까.
— 에블라나
다시 현재. 몽둥이를 쥔 셀몬 앞에, 오빠였던 망자가 섰어요.
몇 번이고 내려쳤지만 병사는 쓰러지지 않았죠. 결국 리드의 불길이 셀몬 대신 그를 재우고, 셀몬은 무너지듯 주저앉습니다.
7. 모닥불의 노래, 그리고 손님인 척하는 조사관
안전가옥에 자리 잡은 지 며칠, 유랑민들은 오랜만에 텐트에서 따뜻한 저녁을 먹어요. 핀은 신나서 백파이프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고 다닙니다.

먼 길을 떠나는 방랑자는, 여기서 어디로 가는 걸까♪
— 타라 유랑민(노래)
밤엔 다 같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노래를 불러요. 리드도 얼떨결에 부르라는 성화에 못 이겨 타라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그런데 그 노랫소리 사이로, 낯선 남자가 하나 끼어들어요. 이름은 '피셔'. 시의회 조사관이라는데, 사실 이 캠프를 지켜본 지 꽤 됐다고 하네요.
피셔는 리드를 따로 불러 앉힙니다. '좋은 밤입니다.' 취조실보다는 훨씬 쾌적한 환경 아니냐면서요. 노래는 계속되는데, 그 아래선 이미 심문이 시작됐습니다.
8. 심문관의 정체, 그리고 불길이 터지다
피셔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에요. 리드의 신원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걸 지적하며, '그건 그림자와 같지 않겠습니까?'라고 짚어냅니다.
게다가 피셔는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더블린 동료들이 리드를 구하러 오고 있다는 것도요. '저희 비호 아래 들어오신다면, 당신이 과거에 행한 범죄에 대해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거절한다!
— 리드
리드는 단호히 거절해요. 백파이프와 첸이 기습적으로 심문 텐트를 무너뜨리고, 그 순간 아무런 기척도 없이 불길이 터져 나옵니다.
당신의 장창에는, 불이 이글거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피셔
백파이프는 창끝의 불길을 봤어요. 그리고 문득 힐록 카운티에서 본 적 있는 장면과 겹쳐지죠. 그 캐스터는, 거리가 불타는 걸 무심히 지켜보던 바로 그 사람이었어요.
9. 8년 전 그 밤, 그리고 불타는 숲
8년 전, 워릭 백작의 마지막 모임 밤으로 돌아갑니다. 백작은 시종에게 짐작 가는 게 있었는지, 시인과 함께 눈보라 속을 걷겠다고 나섰어요.

그날 밤, 백작은 독이 든 술을 받아듭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자매의 언니였어요. '탐욕스러운 드라코, 끝없는 야망을 가진 드라코…… 내가 반평생 조사해 온 게 틀리지 않았구나.' 백작은 웃으며 눈을 감았죠.
동생은 문가에 서서 그 모든 걸 지켜봤어요.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은, 두려움과 연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다시 현재. 안개와 연막 속, 유랑민들은 리드를 부르며 숲을 헤맵니다.
셀몬과 모란도 병사들과 맞서며 길을 뚫어요. 사람들은 그저 앞에 보이는 불빛 하나를 향해 달릴 뿐입니다.

안개 너머로, 누군가 계속 리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요. 리드는 문득 궁금해집니다. '……리드, 저들이 날 부르고 있는 걸까?'
10. 리드는 사실, 더블린의 '리더'입니다

안개가 걷히고, 백파이프는 리드가 만든 불길을 똑똑히 봤어요. '니가 힐록 카운티에 있던 그 캐스터였나. 니가 더블린의 리더 맞나?'
다들 대답을 기다렸어요. 리드는 늘 이런 질문 앞에서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더블린의 '리더' 맞아.
— 리드
리드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숨기지 않아요. 더블린이라는 불길에 던져진 수많은 목숨들, 그중 일부는 필요하지 않았을 희생이었다는 것도요. 그래도 지금 이 순간부터, 다르게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백파이프는 실망하는 법을 잘 몰랐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자기가 누구한테 실망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백파이프는 리드를 떠나지 않기로 해요, 대신 자기 갈 길을 갑니다.
11. 셀몬, 진흙 속에 잠들다
탈출하던 중, 리드는 다시 붙잡혀 끌려갈 뻔했어요. 이번엔 아르모니라는 여자가 나타나 리드를 '로흐시니'라고 불렀습니다. 옛 친구 사이라면서요.
리드는 그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어요. 대신 조용히 되묻습니다, 리더는 알고 있었던 거냐고. 힐록 카운티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 거란 것도요.
혼란한 와중, 셀몬과 모란은 뒤처진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어요. 셀몬은 부러진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막아섰고, 모란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우리 리더를 잡아가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셀몬이 웃으며 말했어요. 그게, 셀몬의 마지막 대사였습니다.
새벽녘, 모란이 홀로 돌아왔어요. 손에는 부러진 검과, 피에 젖은 셀몬의 두건이 들려 있었습니다.
리드는 조용히 묻습니다, 셀몬은 어떻게 됐냐고. 모란은 그저 고개를 저었어요.
이 진흙탕 속에서…… 일어서는 모든 이들을 위해.
— 리드
리드가 손을 들어 올리자, 진흙탕 위로 작은 불꽃 한 송이가 피어나 조용히 시들어 갑니다.
12. 무너진 왕성에서,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다
안개 속에서 몸을 피한 곳은 하필 게일 왕의 무너진 왕성이었어요. 오리지늄 결정이 거의 없어 안전한 곳이었죠.
폐허 안, 리드는 낯익은 불빛을 발견해요. 언니가 다녀간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언니의 목소리를 한 무언가가 리드 앞에 나타나요. '넌 그 불길을 꺼뜨리고 싶은 거구나.'
그림자는 리드를 몰아붙여요. '넌 그저 언니의 그림자일 뿐이야. 그녀는 모든 방면에서 정점을 찍을 능력이 있지만, 넌 항상 망설이며 약한 모습만 보였잖아.'
난 언니의 그림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상 속 '리더'의 그림자니까.
— 리드
하지만 리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들 도망갈 길이 필요했고, 마침 리드가 그곳에 있었을 뿐이라고요.
그림자가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로흐시니, 네가 원하는 건 뭐야?' 리드는 대답 대신, 상처 입은 유랑민에게 손을 뻗었어요. 손에는 불꽃 대신 부드러운 치유의 빛이 흘렀습니다.
난 그저, 내 불길을 찾아냈을 뿐이야.
— 리드
13. 전함 위의 연설, 그리고 리드의 대답
한편 빅토리아 먼바다에선, 언니 에블라나가 7년간의 항해 끝에 웰링턴 공작의 고속 전함을 타고 오크 그로브 카운티로 귀환합니다. 이 도시는 다름 아닌, 자매의 고향이었어요.

우리는 빅토리아가 가진 왕관을 빼앗기 위해 싸우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빅토리아에게 빼앗겼던 우리의 운명을 되찾고, 그 운명을 손에 쥐려는 것이다.
— 에블라나
에블라나는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해요. 오래도록 빼앗겨 온 이름과 운명을 되찾겠다고요.

같은 시각, 갈대숲 어딘가에서 리드도 유랑민들 앞에 섭니다.
모란이 묻습니다, 타라인의 삶을 위해서라는 말은 좀 애매한 것 같다고. 저흰 대체 뭐랑 싸워야 하는 거냐고요.
우리가 죽음을 이길 수는 없어도…… 우리의 삶에 존엄성을 부여할 수는 있어.
— 리드
리드가 답해요. 타라인에게도 추운 밤 몸을 녹일 불과, 노래할 때 함께 나눌 술이 있어야 한다고요.
'가자, 우리도 그중 하나니까.' 리드가 유랑민들과 함께 걸음을 옮겨요.
더블린과 함께 움직이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리드는 담담히 답합니다. '그날이 오면, 나도 그녀를 만나러 갈 거야.'
에필로그: 잘못 지어진 집
'교관'과 아르모니는 여전히 로흐시니를 두고 신경전을 벌여요. 아르모니는 로흐시니가 예전에 몸을 숨겼던 의료 회사를 직접 찾아가 볼 생각이라고 하네요.
첸과 백파이프는 화물차를 얻어 타고 다음 임무로 향합니다. 백파이프는 핀이 준 낡은 라디오를 만지작거려요. 라디오에선 빅토리아와 카즈델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옵니다.
피셔는 캐스터 공작의 승진 제안을 받아들여요. 조사관으로서의 옛 신분은 이제 버려질 예정이라네요.
복귀하던 길, 피셔는 우연히 핀과 마주칩니다. 핀은 나무 장난감을 팔며, 어제 지은 새집을 자랑스레 가리켜요.
도망치세요, 타라인. 집터를 잘못 잡은 것 같군요.
— 피셔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웰링턴 공작의 함대가 지평선 위로 떠오릅니다. 피셔가 한마디 남기고 차에 올라요. 그의 뒤로 벽돌집 무너지는 소리가, 이내 전함의 소음에 묻혔습니다.
소등종이 울리면, 도망칠 준비를 하던 여자가 있었어요. 이젠 스스로 불을 피워 사람들을 데우는 여자가 됐죠. 언니를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된 채로, 그녀는 오늘도 그림자 밖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