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세계관에서 타라는 오랫동안 빅토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 온 나라예요. 그러다 붉은 용 에블라나가 불을 뿌려가며 옛 땅을 되찾았고, 얼마 전 독립을 선언했죠.
그런데 되찾은 나라의 첫 사윈 축제를 앞두고, 사람들 손에 들린 건 자유가 아니라 감자 몇 알과 야간 통행금지였어요.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다들 몸속에 낯선 불씨 하나씩을 품게 됐고요.
이 이야기는 사실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취한 작가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들려주는 '창작'이라고 해요. 근데 이 여자, 결말은 자기가 정하겠다고 자꾸 고집을 부리네요.
작가가 꺼낸 첫 소재는 오래된 전설이에요. 탐욕스러운 붉은 용이 나라를 되찾으려 검은 안개와 손을 잡았고, 그 대가로 죽음의 불꽃이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흐트러뜨렸다는 전설이죠. 그리고 이건, 그 전설이 실제로 벌어진 어느 가을밤의 이야기이기도 해요.
1. 감자로 차린 승전 잔치
가명 '리드'를 쓴 로흐시니는 언니보다 먼저 나 시어셔에 도착해요. 전쟁이 끝난 도시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부엌칼과 그릇, 심지어 의족까지 내놓으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죠.

정체는 영웅 대장장이 쿨란이 짓고 있는 거대한 붉은 용 조각상. 사윈에 맞춰 광장에 세워 타라의 새 탄생을 기념할 거라네요. 그런데 쿨란의 어린 제자 테오만은 다들 눈엣가시로 봐요, 빅토리아 혈통이라는 이유 하나로.
리드는 다정한 주민의 초대로 '승전 잔치'에 앉아요. 고기 스튜, 린수 구이, 오트밀 죽…… 이름은 그럴싸한데, 맛도 색도 냄새도 전부 똑같더라고요.
죄다 감자였던 거예요.
도시엔 밤마다 통행금지도 있어요. 이유를 물으니, 검은 숲의 안개가 가끔 거리까지 스며든다네요. 허락 없이 안개 속에 발을 들이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고, 다정한 주민은 아무렇지 않게 겁을 줘요.
이 와중에 조각상 재료로 쓸 쇠붙이만은 정말 열심히 걷고 있어요. 심지어 다리를 다친 이웃이 의족까지 내놓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정작 쿨란은 절대 안 된다며 완강히 거절해요.
2. 축복이라 쓰고 저주라 읽는다
리드는 신분을 밝히고 언니를 찾아가요. 오랜만의 재회인데도 둘은 서먹해요. 에블라나는 반가운 인사 대신 창부터 어디 있냐고 묻고, 리드는 로도스 아일랜드 창고에 고이 모셔뒀다고 딴청을 부려요.
요새 발코니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던 리드는 그제야 알아채요. 웃고 떠들고 밥을 나눠 먹는 사람들 몸속마다, 아주 작은 보랏빛 불꽃이 타고 있다는 걸요.

발코니에서 리드를 기다리던 건 언니 에블라나. 죽음의 불꽃이 산 사람에게 옮았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진 않아요.
날 죽여, 로흐시니.
— 에블라나
언니는 스스로 죽어 이 불을 다 함께 데려가겠다고 해요. 그게 타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면서요. 하지만 리드는 그렇게 쉬운 답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요.
3. 영웅님, 그 조각상 좀 그만 만드세요
몰래 조사해 보니, 도시가 굶주린 진짜 이유가 드러나요. 관리 하나가 '더블린' 명의로 식량을 몰래 빼돌리고 있었던 거예요. 정작 사람들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애꿎은 빅토리아인만 탓하고 있었죠.
그 와중에 유목민 브리지드가 테오를 데리고 도시를 떠나자고 설득해요. 테오는 쿨란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거절하지만, 브리지드의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어요.
정작 브리지드 본인은 도시를 나서다가 검은 숲에 다섯 번이나 튕겨 나와요. 늘 유목민을 순순히 보내주던 안개가, 이번만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죠.
도시엔 갑자기 '빅토리아 스파이'를 색출하자는 소문이 돌아요. 하필 그날, 테오가 사라지죠. 쿨란과 리드, 그리고 무리를 떠난 영혼수호자 네모스가 각자 흩어져 테오를 찾아 나서요.
찾아낸 진실은 씁쓸해요. 몇 년 전 쿨란이 '영웅'이 된 사연 속엔 사실 정찰병이 아니라 무고한 카라반이 있었고, 테오는 그 유일한 생존자였던 거예요. 그리고 지금, 테오는 마차에 치이고 골목에서 폭행당한 뒤 냉대 속에 방치돼 결국 숨을 거둬요.
쿨란은 무너져요. 공방 한복판에서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노려보며 자책하다가, 결국 그 조각상을 부수기로 결심하죠. 조각상은 텅 빈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되묻는 것 같았어요, 네가 정말 영웅이 맞느냐고.
사윈이 끝나고, 전쟁의 그림자가 다 걷히고 나면…… 너흰 뭘 하고 싶어?
— 쿨란
4. 결국 완성된 조각상, 그리고 그 값
쿨란은 쇠사슬로 몸을 묶고 조각상을 광장까지 직접 끌고 가요. 복수를 외치는 군중 앞에서, 자신이 사실 거짓 위에 세워진 가짜 영웅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하죠.

군중은 분노해요. 하지만 쿨란은 마지막 힘을 다해 조각상의 머리를 내려치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요. 죽는 순간 몸에서 보랏빛 불꽃이 타올랐고, 조각상은 스스로 날개를 펴 대좌 위로 날아가 앉아요.
리드는 조용히 쿨란의 유해를 수습하고, 네모스가 대신 써 준 추도문을 대신 읽어줘요. 이 사건의 첫 희생자를 위한, 나 시어셔의 첫 환화 의식이었죠.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죽은 자가 우리의 기억을 안고 영원히 잠들 수 있게 해줘요.
— 모란
5. 추방된 왕과 떠나는 시간여행
장례를 마친 리드 앞에, 600년 전 죽은 붉은 용의 망령 라브리타흐가 다시 나타나요. 스스로 '추방된 왕'이라 부르는 그는 리드를 옛 왕성 유적으로 데려가죠.

그는 용광로에 손을 넣게 하고,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보여줘요. 동생 손에 죽고, 죽은 채로 목장을 오염시키고, 결국 환화 의식으로만 그 불을 잠재울 수 있었던 옛이야기죠.
라브리타흐는 리드가 아직 모르는 자매의 어린 시절도 함께 꺼내놔요. 죽은 파울비스트를 자기 죽음의 불꽃으로 되살려 동생을 소름 끼치게 한 에블라나, 그리고 그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한 어린 로흐시니, 그리고 그 곁에서 한 번도 웃지 않았던 어린 에블라나.
또 다른 장면도 보여줘요. 후견인 워릭 백작의 저택에서, 다친 언니의 붕대를 감아주며 시를 읊어 주던 어린 로흐시니. 언니는 그 시를 들으며 잠들었지만, 정작 백작이 자매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둘 다 눈치채지 못했죠.
결론은 잔인해요. 에블라나가 죽지 않는 한 불은 계속 번진다는 것. 라브리타흐는 도망치라 하지만, 리드는 고개를 젓죠.
그래도 난 돌아갈 거야. 리드의 대답은 짧고, 그만큼 단단했어요.
6. 자매가 추는 마지막 춤
나 시어셔로 돌아온 리드에게 에블라나는 뜻밖의 제안을 해요. 어릴 적 한 번도 함께 추지 않았던 그 춤을, 이제야 추자고요.

손을 맞잡은 순간, 리드는 알아채요. 창백한 언니의 손, 핏기 없는 얼굴. 언니 역시 자기 불꽃에 조금씩 갉아먹히고 있었던 거예요.
리드는 묻고 싶었어요. 왜 하필 지금이냐고, 어릴 적 함께 읽던 책이며 시는 다 잊은 거냐고. 하지만 에블라나는 그 질문들을 전부 웃어넘겨요.
리드는 마지막으로 설득해요. 함께 사람들을 구하자고, 아직 늦지 않았다고. 하지만 에블라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에블라나는 그제야 무너져요. 상처에서 흘러나온 건 피가 아니라 보랏빛 불꽃, 순식간에 요새 전체를, 그리고 나 시어셔 전역을 집어삼켜요.
7. 관을 끌고 노래하는 영혼수호자
네모스는 리드의 부탁으로 에블라나의 시신을 관에 넣고 도시 곳곳을 끌고 다녀요. 오래된 애도가를 부르며, 집집마다 창문에 불꽃을 비추면서요.

하지만 반응은 참담해요. 사람들은 슬퍼하는 대신 복수할 대상을 찾을 뿐이었어요.
절망 속에서 잠시 나쁜 생각을 품기도 하던 네모스는, 결국 진실을 외쳐요. 붉은 용을 죽인 건 붉은 용 자신이라고, 당신들을 지키려 스스로 죽었다고요.
그 말에 가장 먼저 무너진 건 식량 가게 주인 엠마였어요. 연인 닐스를 전쟁에서 잃고, 뱃속의 아기까지 굶주림으로 잃은 그녀는 오히려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해요.
모란과 브리지드가 함께 부르는 새 노래 — 재회가 아니라, 떠난 이의 길을 비추기 위한 노래 — 를 듣고서야, 엠마는 촛불을 다시 붉은 용에게 돌려주기로 해요.

동이 트면 검은 숲으로 가 안개를 부르네.
— 네모스와 사람들
8. 붉은 용, 두 번째로 태어나다
리드는 광장으로 걸어 들어가 마지막으로 자기 불꽃을 돌려줘요. 그리고 언니의 넋이 깃들어 되살아난 거대한 조각상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죠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죠, 사실은 언니와 나누는 대화였어요.
에블라나는 인정해요. 자신이 준비한 '이별 선물'이 바로 이거였다고. 로흐시니가 직접 자신을 죽이고, 직접 사람들 앞에서 부활해 유일한 붉은 용이 되는 것 말이에요.

불길에서 걸어 나온 리드는 이제 로흐시니 더블린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서요. 자신은 사람들이 흘린 눈물 덕에 죽음의 심연에서 돌아왔으며, 앞으로 다시는 누구도 그런 곳으로 내몰지 않겠다고 선언하죠.
타라의 붉은 용은 로흐시니 더블린뿐이다.
— 로흐시니
그녀는 복수 대신 등불을 켜자고 말해요. 굴욕과 슬픔에서 왔던 불꽃을, 이제는 스스로를 데우고 앞길을 밝히는 불꽃으로 바꾸자고요.

며칠 뒤, 옆 나라의 캐스터 공작에게 낯선 문장이 찍힌 편지가 도착해요. 나 시어셔를 비롯한 남쪽 지역의 계엄을 전부 해제한다는 내용이었죠. 타라는 여전히 빅토리아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적어도 숨은 쉴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이야기 밖에서
……라고, 취한 작가가 이야기를 마쳐요. 그런데 낯선 여자는 만족하지 않네요. 결말이 너무 이상적이라면서, 진짜 결말은 자기가 대신 끝내주겠다고 하죠.
그 순간 작가의 정체가 드러나요. 사실 그는 나 시어셔에서 도망쳤던 더블린의 잔당, '성악가'였던 거예요.
그리고 눈앞의 여자는 이미 죽었어야 할 에블라나. 그녀는 자신에게 되돌아온 막대한 죽음의 불꽃 덕에 의식과 육신이 소멸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었고,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웰링턴 공작을 어떻게 속였는지, 로흐시니가 몰래 성문 밖으로 나가 협상했다는 사실까지 죄다 알려줘요. 죽어야 마땅할 도시 하나를 내주고 안정된 타라를 얻은 셈이니,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고도 하죠.
성악가는 필사적으로 반박하려 하지만, 만년필로 종이를 그어봐도 알아볼 수 없는 잉크 자국만 남을 뿐이에요. 결국 말할 자유조차 빼앗긴 채 입을 다물게 돼요.
에필로그, 에블라나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학자와 마주 앉아 있어요. 리드가 '리드 댄서'로 불리는 사이, 자신은 '네크라스'라는 새 이름을 얻었죠. 삶은 짧고 죽음은 아주 길다고, 그녀는 웃으며 말해요.
네크라스는 언젠가 죽음이 자신을 다시 이곳, 로도스 아일랜드로 데려올 거라며 웃어요. 그때가 되면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거냐고,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되묻고요.
결국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은 아무도 몰라요. 로흐시니가 정말 언니를 완전히 떠나보냈는지, 아니면 그저 재로 변한 그림자 하나를 되살려낸 것뿐인지. 다만 확실한 건 하나, 나 시어셔의 불꽃은 이제 더 이상 보라색이 아니라는 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