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라노는 산크타들의 신성 도시예요. 계율이 삶의 전부인 이곳이, 이번엔 사상 최초로 테라 각국의 사절을 불러모아 '만국 정상회담'을 열려고 해요.
그런데 이 도시, 계율은 철저히 지키면서 건물 폭파는 신고만 하면 합법이에요. 그런 뻔뻔한 봄날, 도시 어느 골목에서는 여덟 살 체첼리아가 아픈 엄마 곁을 지키고 있었어요.
엄마는 죽기 직전 딸에게 딱 한 가지만 신신당부해요. '제복 입은 사람한테는 절대 다가가지 마.' 하지만 정작 체첼리아를 주워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제복'이었습니다.
라테라노의 흔한 하루: 폭발은 합법,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 도시엔 매일 밤 한 남자가 병실을 다녀가요. 휠체어에 앉은 여자는 늘 모른 척, 창밖만 보고요. 둘 사이엔 할 말도,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한편 거리에서는 라테라노 시민들이 기념비적인 기둥을 신나게 폭파하는 중이었어요. 신고도 했고 대피도 시켰고, 심지어 공증소 집행자를 증인으로 세웠으니 완벽하게 '합법'이라나요.
그 소동을 구경하던 컬럼비아 거상을 구해준 건 리베리 피아메타와 타천사 모스티마였어요. 진짜 문제는 그다음, 대성당에서 벌어져요.
라이타니엔 공작 부인이 행패를 부리자 만국 전달자 오렌이 태연하게 맞받아치고, 추기경 벨리브가 뒷수습에 나서요. 오렌은 능글맞고 계산적인데, 어쩐지 미워할 수가 없는 타입이에요.

벨리브는 오렌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도 처벌하겠다며 데려간 별실에서, 둘은 또 티격태격 잘만 지내요. 교황은 그 광경을 보며 그저 웃을 뿐이에요.
같은 날 아침, 스테보누스 구역에서는 페데리코라는 원칙주의 집행자가 조용히 시신 한 구를 발견해요. 유언도, 유언 등록도 없는 독신 여성 — 이름은 페오리아.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 그 시각, 옆집엔 아무도 모르는 여덟 살짜리 아이가 혼자 남아 있었어요. 엄마 말대로 나가지도, 들키지도 않은 채로요.
수습 집행자, 미아 소녀 주웠다가 인생 최대 사고를 치다
체첼리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섰다가 쓰러져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간 사람이 바로 수습 집행자 에젤이에요 — 정시 퇴근이 인생 목표인데, 정작 오지랖은 라테라노에서 제일 넓어요.
에젤은 검사 결과를 보고 소름이 돋아요. 이 여덟 살 아이, 분명 산크타인데 고통도 초조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거든요. 산크타끼리는 서로 감정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 사이 병실엔 수상한 간호사가 등장해요. 정체는 리베리 파티아 — 체첼리아를 '동료'라 부르며 데려가려 하죠. 이베리아 출신인 그녀는, 산크타를 신처럼 모시면서도 자각 못 하는 라테라노 리베리들을 가장 싫어해요.
에젤은 미리 열어둔 창문으로 시간을 벌고, 체첼리아를 업고 도망쳐요. 약속했거든요. 엄마를 찾아주겠다고.
그런데 그 죽은 여자, 이름이 낯익다
체첼리아를 따라 옛 동네를 헤매던 에젤은 아이 입에서 나온 엄마 이름을 듣고 얼어붙어요. 페오리아 — 오늘 아침 자신이 시신을 확인한, 바로 그 여자였거든요.
한편 교황청은 이미 사건을 접수하고 사람을 보냈어요. 리베리 호위 피아메타가 직접 나서죠.
병원에서 마주친 파티아에게 그녀는 옛정을 걸고 충고해요. '지금 멈추면 아직 늦지 않았어.'
파티아는 코웃음을 쳐요. '산크타의 계율이 리베리한테 제대로 적용된 적 있어?' 피아메타는 대꾸하지 않아요. 대신 총을 겨눠요.

르무엔은 휠체어 재활 중인 왕년의 사격왕이에요. 5년 전 사고로 이렇게 됐다는데, 정작 본인도 모스티마도 그 얘기만 나오면 묘하게 말을 아껴요.
산크타이면 안 되는 산크타, 그리고 계산이 빠른 남자
결국 에젤은 만국 전달자 오렌과 마주쳐요. 오렌이 순순히 답해줘요 — 체첼리아는 산크타와 살카즈의 혼혈, '되지 말았어야 할 산크타'라고. 원래 이런 혼혈은 부모 한쪽의 종족을 그대로 물려받아야 하는데, 얘는 예외라는 거죠.
오렌의 속내는 따로 있어요. 체첼리아라는 존재 자체가 협상 카드라는 거예요. '넌 라테라노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어.' 폭력은 취향이 아니라면서도, 눈빛은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어요.
도망치던 길, 노래를 부르던 솜사탕 장수의 뿔은 가발이 아니었어요. 라테라노 한복판에 살카즈가 잠입해 있었던 거죠. 정체가 들통나자 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동료를 지키려 몸을 던져요.
에젤은 그날 밤, 이 일에서 발을 뺄까 수도 없이 고민해요. 그냥 반듯한 직장에 다니며 제시간에 퇴근하는 삶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이미 체첼리아와 약속을 해버렸어요.
위령성당에 온 손님이 하필 지명수배범이라니
체첼리아는 엄마와 제대로 작별하고 싶다며 위령성당에 며칠 머물길 청해요. 그런데 거기, 수도사들도 깍듯이 '선도자님'이라 부르는 수상한 인물이 있어요.
'나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아. 안도아인이라고.' 그는 자신을 라테라노가 외면한 이들의 문을 열어주는 존재라 소개해요. 버려진 자, 망가진 자, 살카즈들의 편이라고요.
그리고 어제의 그 솜사탕 장수 로셀라가 다시 나타나요. 체첼리아에게 살카즈의 고향 카즈델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빠가 왜 라테라노에 못 오는지도 어렴풋이 알려줘요.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에젤은 이 상황이 몹시 불편해요.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안도아인의 말을 반박할 수가 없어요.
체첼리아는 로셀라 옆에서 처음으로 마음 편히 웃어요. 아빠의 뿔을 닮은 그 검은 뿔을 보면서, 언젠가 살카즈들의 고향에도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요.
8년 전, 웃지 않은 사람들
밤마다 병문안을 오는 모스티마와 피아메타에게 르무엔이 묻지도 않은 이름을 흘려요. '안도아인, 그 사람 만났구나.' 피아메타의 표정이 굳어요.
8년 전, 이 셋과 안도아인은 한 소대였어요. 평범한 소탕 작전 중 피아메타만 잠시 지원을 나갔다 돌아왔을 때, 모든 게 이미 늦어 있었죠. 안도아인은 사라졌고, 르무엔은 5년을 혼수상태로 보냈어요.
그 녀석 얘기를 할 때마다, 너희 태도는 꼭 주말 피크닉 얘기하는 것 같네.
— 피아메타

장례식 날, 피아메타와 모스티마는 결국 안도아인을 코앞까지 몰아붙여요. 하지만 그는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져 버려요.
몸싸움은 오렌이, 기적은 체첼리아가 만들다
안도아인은 체첼리아 곁을 떠나기로 해요. 아이에겐 이미 '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서요.
대신 체첼리아는 혼자 라테라노의 옛 시계탑, '계시의 석탑'으로 향해요.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요.
가는 길을 막아선 건 오렌이었어요. 카드로 쓸 아이를 순순히 보낼 순 없다는 거죠. 이번엔 에젤이 몸으로 막아서고, 여기에 페데리코가 나타나 오렌의 만국 전달자 직위 해제를 선언해요.

그사이 체첼리아는 탑 꼭대기에서 엄마가 가르쳐준 살카즈의 옛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요. 서툰 가사, 앳된 목소리로요.

영웅은 곧 출발한다, 멀리 향한 길을 따라 자신의 꿈을 실현하러 떠난다…… 아무리 먼 길일지라도, 반드시, 반드시.
— 로셀라
이 노래는 이야기 내내 세 번 반복돼요. 부르는 사람도, 이유도 매번 다른데, 뜻은 늘 하나예요.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죠.
교황과 방랑자, 신 앞에서 나란히 방아쇠를 당기다
종이 울리자마자 안도아인은 곧장 교황을 만나러 가요. 대성당 안, 두 사람만 남은 자리에서 오래 묵힌 질문이 터져 나와요. 라테라노는 정말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안도아인은 자신의 고향, 로카마레아 이야기를 꺼내요. 라테라노에 도움을 청했지만 '너는 우리 편이지만 그들은 아니다'라는 답만 들었고, 돌아갔을 땐 마을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고요.
낙원이 낙원이라 불리는 까닭은, 바깥의 광야가 너무나도 춥기 때문이다.
— 이반젤리스타 11세
말이 안 통하자 두 사람은 동시에 방아쇠를 당겨요. 그런데 둘 다 무사해요. 계율을 어기면 타락한다는 그 법칙 자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시험대에 올라요.

교황은 안도아인을 대성당 지하, 성인들의 뼈가 잠든 곳보다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요. 그곳엔 어떤 책에도 기록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어요.

8년 전, 그 빗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피아메타, 모스티마, 르무엔, 그리고 안도아인 — 넷은 한 소대였어요. 그날은 그냥 평범한 소탕 작전이었어요. 상대는 살카즈 약탈자 무리, 그런데 이상하게도 적의가 없었대요.
피아메타가 잠깐 지원 요청을 받고 자리를 비운 사이, 안도아인은 대신 그들을 도우러 갔어요.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죠. 르무엔은 총에 맞아 쓰러졌고, 안도아인은 타천사가 되어 사라졌어요.

그 뒤로 8년, 피아메타는 안도아인을 쫓는 데 인생을 썼어요. 복수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이 일의 끝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서요.
모스티마도 르무엔도 그날 이후 이상하리만치 담담해요. 마치 이미 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처럼요. 피아메타 눈엔 그게 더 낯설고 서운해요.
집념이라 쓰고 우정이라 읽는다
안도아인이 지상으로 돌아오자 피아메타와 모스티마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안도아인의 상태가 이상해요. 신념도 참회도 아닌 말들을 횡설수설 쏟아내요.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피아메타가 소리쳐요. 안도아인은 담담히 답해요. '그때 그 일이 다시 일어난다 해도, 난 또 그렇게 할 거야.'

너, 나, 모든 사람, 다들 집념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게 아니야?
— 피아메타
총구를 겨눈 건 안도아인이 아니라 그의 손에 들린 총이었어요. 피아메타는 죽이는 대신, 무기를 쏴서 떨어뜨려요. 그게 그녀 나름의 결론이었어요.

그 틈에 오렌이 끼어들어요. 합법적으로 신청한 폭발(!)로 연막을 치고 안도아인을 놓아줘요. 대신 벨리브 앞에서 자기 정체가 들통나는 대가를 치르죠.
혼란이 가라앉자 교황이 단파 방송으로 각국 사절 앞에 서요. 그리고 훗날 '라테라노 선언'으로 불릴 연설을 시작해요 — 국가 간 안전을 함께 보장하자는, 최초의 제안이었어요.
그 후, 다들 각자의 길을 골랐다
회의는 무사히 끝났고, 다들 다음 걸음을 정해요. 르무엔은 교황청 제7청으로, 오렌은 벨리브 밑에서 근신 중이에요. 배신할 뻔한 전 만국 전달자 신세로요.
페데리코는 그사이에도 조용히 다음 조사를 이어가요. 오렌의 지난 2년 치 외출 기록을 뒤지다가,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요. 하지만 그 얘기는, 또 다른 날의 몫이에요.
피아메타는 로도스 아일랜드 소속이 돼요. 새 코드네임은 본인이 직접 골랐어요 — '여명의 파괴자'. 모스티마는 여전히 피아메타 감시(?) 역할에서 못 벗어나요.
에젤과 체첼리아는 라테라노를 떠나기로 해요. 도망이 아니라, 아빠를 찾으러 가는 여정이에요. 엄마의 수호총을 챙기고, 교황이 슬쩍 눈감아준 덕분이죠.
너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마.
— 교황
안도아인도 패스파인더들과 함께 다시 길을 떠나요. 파티아가 왜 따라가냐고 묻자 그가 답해요. 오랫동안 자신들이 광야를 외롭게 걷는다 생각했는데, 그건 자신의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고요.
체첼리아는 떠나는 길, 노을 속에서 광륜을 쓴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순교자'라는 단어를 떠올려요. 정확한 뜻은 몰라도요. 그리고 에젤의 손을 잡고, 자신도 그 낯선 길 위에 첫발을 내디뎌요 — 엄마가 남긴 그 말, '제복 입은 사람에게 다가가지 마라'를 이미 훌쩍 넘어선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