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미어는 기사의 나라예요. 근데 그 기사들이 창을 겨누는 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돈과 광고가 번쩍이는 경기장이 된 지 오래거든요.
그리고 여기, 검을 내려놓은 기사가 한 명 있어요. 시종도, 갑옷도, 심지어 자기 검을 쓸 마음조차 없이 카시미어의 시골을 홀로 떠도는 사람이요.
이건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검을 뽑기까지의 며칠이에요.
검을 안 쓰는 기사가, 검만은 챙겨 왔습니다
늦가을의 카시미어 남부, 어느 시골 마을. 무에나는 니어 가문의 사람이자 '빛의 기사'의 삼촌인데요. 권력자들의 싸움터에서 물러난 지 오래라, 이제 그를 적으로 둘 사람도 없어요.
마을의 한 노인은 그를 알아봐요. 라이타니엔에서 도망쳐 뿔까지 자르고 20년을 숨어 산 옛 교사인데요. 예전에 무에나가 자기를 유랑민 틈에 조용히 섞여들게 해 준 은혜를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정작 무에나는 기억 못 하지만요.
무에나가 찾는 건 사람이에요. 15년 전 사라진 형 부부, 그러니까 실종된 두 니어요. 소식 하나 없는데도, 그는 예전에 다녔던 길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걷거든요.

같은 시각,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선 두 옛 친구가 만나요. 한쪽은 톨런드, 살카즈 바운티 헌터의 두목이고요. 다른 한쪽은 츠시보르, 은빛 갑옷의 출정 기사단장이에요. 둘 다 무에나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죠.
츠시보르는 이 근방을 어지럽히는 습격 사건을 조사한다며, 톨런드에게 게일 공업 근처엔 얼씬도 말라고 당부해요. 근데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얘긴 따로 있었어요.
몇 년 전, 츠시보르가 사랑하던 기사 셀리나가 누명을 쓰고 그랜드 나이트 영지로 끌려가 죽었거든요. 그때 그는 무에나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는데, 답장을 받지 못했어요.
톨런드가 조심스레 물어요. 무에나를 아군으로 삼고 싶은 거냐, 아니면… 복수하고 싶은 거냐고.
마을을 벗겨먹으러 온 변호사가, 마을을 구해놓고 떠났어요
무에나의 발길엔 동행이 하나 붙어요. 데슈치,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서 무패를 자랑하는 잘나가는 변호사인데요. 렌터카가 고장 나는 바람에 무에나에게 길 안내를 얻게 돼요.
그녀가 맡은 일은 게일 공업 편에 서서, 땅을 빼앗기게 된 레이스톤 마을 주민들의 이주 보상금을 후려치는 거예요. 마을 측 변호사 햄을 논리로 짓눌러서, 정말로 헐값에 합의를 받아내죠.
근데 밤이 되자 데슈치는 이상하게 조용해져요. 오랜만에 별이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법의 위엄과 공정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던 신입 시절의 자기를 떠올리거든요.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햄에게 자료 하나를 슬쩍 '분실'해요. 게일 공업의 토지 계약 자체가 무효라는 걸 증명할 결정적 증거를요. 마을을 벗겨먹으라고 백만 마르크를 받은 변호사가, 마을이 이길 패를 상대에게 쥐여준 거예요.
왜냐고 묻는 햄에게 데슈치는 웃어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앞으로도 이 마을 맥주를 마시고 싶어서라고요. 그러곤 직장을 그만두고, 즈보넥으로 향해요.
폭동을 일으켰다고 자수한 사람은, 그날 우리랑 같이 있었어요
무에나가 향한 즈보넥은, 카시미어 남부 국경의 오래된 요새 도시예요. 요즘 이곳 신시가지 공사판에선 감염자 폭동이 이어지고 있죠.
뉴스는 제노 셸빈이라는 감염자 작업반장을 주모자로 지목해요. 그가 자수했다고요. 근데 이걸 도저히 못 믿는 두 사람이 있어요. 플레임테일과 애쉬락, 피누스 실베스트리스 출신으로 지금은 로도스 아일랜드 일을 하는 두 기사예요.
폭동이 터졌을 때 제노는 이 둘과 함께 있었거든요. 오히려 곤경에 빠진 둘을 구해 준 게 제노였고요. 범인일 리가 없어요.
무에나가 게일 공업을 설득해 기소를 취하시키고, 두 기사가 제노를 빼돌린 뒤에야 제노는 입을 열어요. 어느 출정 기사가 자기한테 폭동의 누명을 뒤집어써 달라고 했다고요. 가족을 위한 돈이 필요했다고요.
감염자 하나에게 죄를 씌우고, 언론이 공포를 키우고… 누군가 이 도시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가짜 갑옷을 입은 배우가, 진짜 영웅이 되어버립니다
그 밤, 즈보넥의 폐기된 거리에서 폭발이 일어나요. 컨테이너가 산처럼 쌓인 빈민가에서, 아이들이 잔해에 깔리죠.
이 거리엔 사연 있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셰브치크, 한때 '플라스틱의 기사'라 불리던 은퇴한 경기장 기사인데요. 기업 후원 대신 직접 만든 플라스틱 갑옷을 입던 사람이라, 지금은 신분을 숨기고 가족과 조용히 살고 있어요.
마침 그의 아들이 그 거리에서 놀고 있었고, 셰브치크는 아들을 찾겠다며 불길로 뛰어들어요. 결과적으로 그는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구해내고, 이름 밝히길 거부한 '의인'이 되죠.
근데 정작 아들이 아빠 같은 기사가 되고 싶다고 하자, 셰브치크는 딱 잘라 막아요. 꿈이 아름다울수록 실망하게 될 거라고요.
한편 그 불길 속에서 무에나는 아이들을 구하다, 라이타니엔에서 온 어느 귀족과 마주쳐요. 카시미어의 활기가 부러워서, 자기 영지를 고치려고 빈민가를 직접 보러 왔다는 사람이었죠.
둘이 겨우 문을 부수고 들어간 방에선, 부서진 통신 장비 하나가 소리를 흘리고 있었어요. 라이타니엔과의 전쟁을 대비한다는, 군사 정보였죠.
그 말을 함께 들어버린 라이타니엔 귀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요.
누군가는 이 도시에 전쟁이 필요하다고 믿었어요
그날 밤늦게, 무에나와 톨런드는 흩어진 조각을 맞춰요.
죽은 귀족 마렉의 아들이 자격도 없이 서명한 토지 계약, 그 뒤에 선 기사단, 감염자를 모집하고 언론에 뇌물을 먹여 폭동을 연출한 게일 공업. 이 모든 게 하나를 향하고 있었어요. 카시미어와 라이타니엔 사이에 전쟁의 불씨를 지피는 거요.
내일 열릴 양국 우호의 오픈식에서, 라이타니엔 귀족을 죽인다. 그게 이 계획의 마지막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걸 지휘하는 사람이, 츠시보르였어요.
근데 정작 무에나의 검은 그의 손에 없었어요. 츠시보르가 손질을 맡긴다며 기사단 장인에게 가져가 버렸거든요. 그래서 검을 내려놓았던 기사는, 옛 친구를 막으러 가기 위해 남의 검 한 자루를 빌려요.

이기고 싶지 않은 결투에서, 이겨버렸습니다
12월 1일 새벽. 부하들마저 등을 돌린 츠시보르는, 홀로 라이타니엔 귀족을 죽이러 가요. 그리고 그 앞을 무에나가 막아서죠.
빗속의 결투는 사실 대화였어요. 츠시보르는 무에나에게 계속 물어요. 이 썩은 걸 다 보고도 왜 검을 뽑지 않았느냐고. 셀리나를 구할 수 있었으면서 왜 눈길조차 주지 않았느냐고.
기사는 권력에 고개를 숙여서는 안 돼. 하지만 타인의 고난에 무릎을 꿇는 것을 마다해서도 안 되지.
— 츠시보르
무에나는 그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아요.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을 판돈처럼 거는 그런 신념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요.
결국 무에나가 이겨요. 근데 그는 검을 거둬요. 이렇게 죽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그저 츠시보르가 멈추기만을 바랐거든요.
하지만 츠시보르는 되물어요. 자기가 누구에게 졌다고 말하길 바라느냐고. 비열한 술수의 귀족들에게, 거짓 평화를 파는 장사치들에게… 그는 오직 무에나에게만은 지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해요.
그리고 쓰러지기 직전, 츠시보르는 무에나가 스무 해를 기다린 대답을 건네요. 몇 년 전 라이타니엔에 잠입했을 때, 사라진 두 니어를 우연히 만났다고요.

무에나가 다른 이에게도 이 얘길 했느냐 묻자, 츠시보르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요. 그러곤 창에 기댄 채, 황야에서 수없이 보아 온 텅 빈 갑옷처럼 조용해지죠.
무에나는 빗속에 무릎을 꿇고,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자에게 기사의 예를 표해요.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래도 찾으러 갑니다
사건은 파헤쳐졌어요. 수많은 기업과 옛 귀족들이 연루됐고, 몇 년 전 뒤집을 수 없던 판결까지 다시 열렸죠. 근데 그때 죄를 지은 자들도,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 거의 남지 않았어요.
한편 그랜드 나이트 영지로 돌아온 마가렛은, 니어 가문의 '빛의 기사'로서 짊어질 무게를 조금씩 배워가요. 할아버지 키릴의 묘에 다녀오고, 자기를 겨누는 상인들의 위협과도 맞서면서요. 옛 장인들은 사라진 스니츠와 무에나 이야기를 나누며, 두 니어가 지금 어디 있을까 궁금해하죠.
톨런드는 무에나에게 로도스 아일랜드의 초대장을 건네요. 그곳의 박사가, 형과 형수에 관해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요.
무에나는 여전히 소식 하나 없는 두 사람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서요. 근거 없는 희망이라고 톨런드가 놀려도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랜드 나이트 영지에서 내가 품었던 모든 희망을 더해도 이보다 많지는 않아.
— 무에나
검을 내려놓았던 기사는, 그렇게 사라진 가족을 찾아 다시 떠나요. 모든 길은 이미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지만, 그가 찾는 건 그 길 바깥에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