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미어는 기사의 나라라고 불려요. 하지만 이 나라를 실제로 움직이는 건 검이 아니라 상업연합회의 장부죠.
6년 전 감염자로 몰려 추방당했던 전 챔피언 마가렛 니어가, '빛의 기사'라는 이름을 걸고 돌아옵니다. 감염자 기사들의 봉기와 재계의 암투가 뒤엉킨 이번 토너먼트, 그녀가 딛는 자리마다 소란이 따라와요.
그리고 그녀 자신도 모르는 진실 하나가, 이 모든 소란의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1. 6년 만에 돌아온 챔피언, 아무도 안 반갑다
카봐렐리엘키 국립 아레나, 해설가 빅마우스 모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카시미어 특별 토너먼트가 개막해요. 상금풀은 관중이 도시에서 쓰는 돈 한 푼까지 빨아들이며 불어나고, 상업연합회 대변인 맥키는 신임 대변인 말키위츠에게 '감염자'라는 두 글자를 조심스레 흘립니다.
니어 가문의 오랜 이웃들, 대장장이 조피아와 여동생 마리아는 마가렛의 갑옷과 무기를 손보느라 여념이 없어요. 마리아의 삼촌 무에나는 회사원처럼 조용히 살아가지만, 얼마 전 마가렛과의 진지한 결투에서 아츠 한 번 안 쓰고 졌다는 소문이 돕니다.
그 사람은 마가렛을 깔보고, 빛의 기사를 깔보는 거야.
— 조피아
한편 도시의 틈새에서는 감염자 기사들의 모임 '피누스 실베스트리스 기사단'이 움직이고 있어요. 리더 소나('불꽃 꼬리의 기사')와 그레이너티('회색 붓꼬리의 기사'), 저격수 저스티나('송곳니의 기사')는 아머레스 유니온에 쫓기던 귀족 청년 셰브치크('플라스틱의 기사')를 거두어들입니다.
그들이 상대하는 아머레스 유니온의 실무자는 라주라이트 로이와 모니크. 겉으론 능글맞은 만담 콤비지만, 실은 이사회의 지시로 도시 곳곳에서 감염자를 '처리'하는 살인청부업자들이에요.
새로 부임한 대변인 말키위츠는 전임자 차르니가 하루아침에 추방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선배 맥키에게서 '불문율' 하나를 전달받아요. 섹터 제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것이었죠.
2. 우승 상금보다 값싼 목숨
토너먼트 첫날, 이름 없는 감염자 기사 한 명이 난투전 종목에 나서요. 상대 귀족 기사 올머 잉그라는 '광석병 쓰레기'라 비웃으며 그를 몰아붙이고, 감염자는 마지막 순간 오리지늄 아츠까지 쥐어짜내 저항하지만 결국 경기장 한복판에서 숨을 거둡니다.
생중계로 퍼진 죽음에 카시미어 전체가 들끓어요. 정작 방송은 그의 죽음을 '규정 위반으로 인한 자업자득'으로 정리하고, 잉그라는 하루 만에 다시 풀려나죠.
그의 이름은 제이미였어요. 이혼하고 혼자 딸을 키우던 전직 스포츠 기사, 아침마다 다른 아이들을 돌봐주던 사람이었죠. 동료 이보나('거친 갈기의 기사')는 그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조용히 무너집니다.
……부탁이야…… 도와줘……
— 제이미
이보나는 대답 대신 약속해요. 소나가 그의 아내와 딸을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카시미어라는 도시가 감염자를 어떤 식으로 '소비'하는지, 모두가 새삼 깨닫는 밤이었습니다.
3. 니어 가문의 비밀, 그리고 낯선 손님
선술집에서는 노기사 포겔바이데와 대장장이 코발이 여전히 티격태격 만담을 주고받고, 마리아는 언니의 새 무기를 두고 골머리를 앓아요.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조피아는 문득 궁금해합니다. 무에나가 정말로 무에나답게 살고 있는 게 맞는지.
그러던 어느 밤, 술집 문이 열리고 낯선 갑옷 기사가 걸어 들어와요. 고대어로 무언가를 읊조리던 그는 늙은 포겔바이데를 '바트바야르'라는 낯선 이름으로 부릅니다. 아무도 모르던 이름, 아주 오래전에 잊힌 종족 쿠란타의 옛 호칭이었어요.
이 기사는 훗날 '악몽의 기사'라 불리게 될 톨라. 부모도, 동포도 없이 홀로 '천도'라는 이름의 성인식을 완수하려 카시미어까지 흘러든 나이츠모라의 마지막 후예입니다.
비슷한 시각, 라이타니엔 출신의 프리랜서 기사 비비아나 드로스테('양초의 기사')는 근거 없는 스캔들에 시달리고 있어요. 대변인 맥키가 뒷수습을 하는 사이, 그녀의 다음 상대가 정해져요. 바로 빛의 기사입니다.
드로스테는 라이타니엔 대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높은 탑에 갇혀 몰래 훔쳐 온 양초 하나로 시집을 읽으며 자랐어요. 그런 그녀에게 카시미어는 처음으로 '기사'라는 이름을 되찾아준 곳이었죠.
경기 전날 밤, 그녀는 일부러 마가렛을 찾아가 넌지시 경고를 건네요. 연합회가 이번만큼은 빛의 기사를 패자 조로 밀어 넣을 작정이라는 걸.
곧 비바람이 몰아칠 거예요. 요즘 하늘을 보면 별이 유난히 반짝이거든요.
— 드로스테
4. 양초와 태양이 맞붙다

드로스테의 아츠는 촛불 자체가 아니라 그 주위의 그림자를 다스리는 힘이에요. 두 사람은 검을 맞대며 '기사란 무엇인가'를 놓고 대화를 나누고, 마가렛은 담담히 대답합니다.
기사란 모든 세상을 비추는 숭고한 자이다.
— 마가렛
긴 대결 끝에 승부를 가른 건 드로스테 자신의 판정패 선언이었어요. 촛불이 잘려나가는 순간 그녀는 패배를 인정하며 다음을 기약합니다.
경기가 끝난 밤, 마가렛은 로도스 아일랜드의 의사 샤이닝과 나이팅게일과 함께 카시미어의 밤거리를 걸어요. 잠시나마 농담을 나누고, 나이팅게일의 손을 잡고 춤도 춰봅니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자신의 빛을 다 태우는 순간이 오기 전에.
— 샤이닝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해요. 밤하늘에서 다크아이언의 화살 한 대가 날아들고, 아머레스 유니온 로이가 나타나 '정전협정'을 제안합니다. 빛의 기사와 로도스 아일랜드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머지 감염자들은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거였죠.
마가렛은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해요.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방식으로는, 처음부터 그녀가 원하던 평화가 아니었으니까요. 감염자를 밟고 넘어가려는 자들의 그림자가, 조용히 몸집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5. 그랜드 나이트 영지, 하룻밤 잠들다
소나 일행은 카봐렐리엘키의 동력로를 습격해 도시 전체를 일시 정전시키고, 그 틈에 상업연합회 건물에 잠입해 섹터 제로의 기밀 자료를 빼내려 해요. 바운티 헌터 톨런드 캐시가 뜻밖의 조력자로 합류합니다.
이보나가 아머레스 유니온 순찰대를 정면으로 유인하는 동안, 그레이너티는 에너지 구역을 습격하고 소나는 그 틈에 건물로 숨어들어요. 감정회 쪽에서도 은밀히 경비를 빼돌려 준 상태였죠.
하지만 계획은 처음부터 아머레스 유니온에게 읽히고 있었어요. 로이가 쏜 화살에 소나가 섹터 틈으로 떨어지는 순간, 정체 모를 손이 몰래 그녀를 받아냅니다. 이보나는 모니크와 정면으로 맞붙어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굴복하지 않아요.
정전이 이어지는 동안 술집에서는 포겔바이데와 코발이 예비 전등을 켜놓고 아머레스 유니온을 두들겨 패고 있었어요. 니어 자매를 찾으러 온 자객들에게, 늙은 기사들은 뜻밖에도 아직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줍니다.
내가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지지 않아.
— 이보나
정전 속에서 도시가 통제 불능에 빠지자, 감정회가 침묵을 깨고 움직여요. 위장한 실버랜스 페가수스 기사단이 카봐렐리엘키 한복판으로 행군해 들어옵니다.

그들은 마가렛의 할아버지가 이끌었던 전설의 기사단이었어요. 상업연합회도, 아머레스 유니온도 감히 손댈 수 없는 이름이 카시미어의 밤을 정리하고 지나갑니다.
6. 초원을 잃어버린 사냥꾼
톨라의 어머니는 오래전 맹수에게 목숨을 잃었어요. 그날부터 그는 카간(왕)과 케식(근위 전사)의 전설을 좇으며, 자신이 그 전통의 마지막 계승자라 믿어 왔습니다.
그에게 카시미어는 기사의 나라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곳이었어요. 사냥할 맹수도, 함께 걸을 동포도 없이, 그저 감염자와 미노스인과 자기 자신만 남은 초원을 향해 그는 홀로 화를 삭였습니다.
마가렛과의 결투는 규정 위반으로 무승부 처리되고, 분을 못 이긴 톨라는 니어 가문의 집까지 쫓아와요. 홀로 그를 막아선 건 갑옷도 없는 마리아였습니다.

기사의 방패는 타인을 지키는 거라고 언니가 알려줬어. 명예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 마리아
톨라는 결국 물러나요. '타인의 신념만으로는 강해질 수 없다'던 그가, 겁 없이 언니를 지키려는 소녀 앞에서 처음으로 흔들린 순간이었습니다.
며칠 뒤 준결승, 톨라의 진짜 상대는 감염자 챔피언 피의 기사 디카이오폴리스였어요. 톨라는 소환한 옛 군대의 환영으로 경기장을 뒤덮지만, 디카이오폴리스는 담담히 그 환영을 도끼로 걷어냅니다.

패배한 톨라는 조용히 북쪽으로 떠나요. 실패를 인정하되 더는 나약함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천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되뇌면서.
7. 빛과 피, 결승에 서다
결승전, 두 감염자 챔피언 마가렛과 디카이오폴리스가 마주 서요.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 디카이오폴리스는 담담히 인정합니다. 마가렛이 이룬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럼에도 그녀는 '위대한 실패자'라고.
디카이오폴리스는 마가렛을 두고 '위대한 실패자'라 불러요. 헌신과 투쟁 정신은 존경하지만, 결국 그녀는 아무도 지켜내지 못한 채 가족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죠.
무기가 부서지도록 맞붙던 두 사람은, 승부보다 먼저 서로의 삶을 나눠요. 그리고 마가렛은 그동안 감춰온 사실을 처음으로 입 밖에 냅니다.
그녀는 애초에 감염된 적이 없었어요. 6년 전 할아버지 키릴 니어가, 상업연합회의 표적이 될 어린 손녀를 지키려 일부러 그녀를 추방시킨 것이었죠. 관중석은 순식간에 술렁입니다.
혼란 속에서도 승부는 마가렛의 승리로 끝나요. 그녀는 쓰러진 디카이오폴리스를 부축해 일으켜 세웁니다.
이곳에…… 패자는 없다, 피의 기사.
— 마가렛
두 챔피언은 나란히 챔피언스 월로 걸어가요. 아머레스 유니온의 화살이 몇 번이나 날아들지만, 그때마다 감염자 기사들과 살카즈 의사, 그리고 니어 가문의 오랜 벗들이 그 앞을 막아섭니다.

결국 실버랜스 페가수스 기사단이 두 사람을 호위해 마지막 길을 열어줘요. 대기사장 이올레타 로시는 늙은 눈으로 마가렛을 바라보며, 그녀의 할아버지를 꼭 닮았다고 웃습니다.
그 후, 빛은 혼자 걷지 않는다
무에나는 3개월 치 밀린 휴가를 쓰겠다며 홀연히 카시미어를 떠나요. 오래전 소식이 끊긴 형과, 보석처럼 아름다웠다는 어떤 사람을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톨런드에게만 살짝 털어놓습니다.
아머레스 유니온의 로이와 모니크는 어느새 새 가게를 차려요. 세정제를 파는 평범한 상점이지만, 사실은 상업연합회 이사가 될 예정인 인물들의 위장 신분이었죠. 플래티넘은 그제야 자신이 애초에 희생양으로 죽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대변인 말키위츠는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안색이 굳어요. 통화 상대는 로즈 미디어 그룹의 대표이자, 그를 대변인 자리에 앉힌 진짜 배후, 그리고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소나 일행은 톨런드를 따라 그랜드 나이트 영지 밖 어느 마을에 도착해요. 그곳엔 상업연합회에 등 돌린 감염자와 농민, 몰락한 귀족과 바운티 헌터가 뒤섞여 있었죠. 상업연합회와 싸우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미야와 박사, 샤이닝과 나이팅게일은 무사히 카시미어를 떠나요. 마가렛은 언젠가 로도스 아일랜드가 부르면 다시 함께하겠다고, 그리고 필요할 땐 반드시 그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약속합니다.
카봐렐리엘키의 불빛이 다시 켜지고, 상업연합회 건물의 등불도 환하게 돌아와요. 도시는 여전히 상업연합회의 장부를 따라 굴러가겠지만, 이제 그 장부 바깥에서도 촛불과 태양이 나란히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