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미어는 온 나라가 기사에게 열광하는 곳이에요. 아레나의 함성, 쏟아지는 후원금, 팬들의 환호…… 그 화려한 조명 아래서 기사들은 서로를 쓰러뜨리며 스타가 되죠.
근데 그 빛이 닿지 않는 자리가 있어요. 광석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지하 경기장에서 피를 흘리며 기사 칭호 하나를 겨우 따내는 감염자 기사들이요.
이건 그 빛과 그림자 사이에 낀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나" 되묻는 사람들.
감염자만 모아 기사단을 차렸는데요
소나는 불꽃 꼬리의 기사예요. 자라크 감염자인데, 늘 헤헤 웃으며 여유로운 척하는 낙천가죠. 근데 그 웃음 아래엔 단단한 각오가 있어요.
지하 경기장 난투전을 앞두고, 소나가 처음 보는 감염자 기사한테 슬쩍 손을 내밀어요. 몰래 팀을 짜자고. 이기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기게 하고 싶지 않아서"래요. 난투에서 누군가 살아남으면, 누군가는 죽어야 하니까요.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지만, 누군가 살아남으면…… 누군가는 죽어야 된다는 거잖아.
— 소나
그때 손을 잡은 게 그레이너티, 회색 붓꼬리의 기사예요. 뒤끝 길고 무뚝뚝한데 속은 정직한 자라크죠. 둘은 그렇게 콤비가 돼요.
그리고 감염자 기사들을 모아 기사단을 세워요. 이름은 피누스 실베스트리스. 돈 벌려는 다른 기사단이랑 달라요. 감염자끼리 서로 돕자는 거예요.
기사 상금을 몽땅 털어서, 갈 곳 없는 일반 감염자들을 그랜드 나이트 영지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숨겨 먹여 살리거든요. 근데 그럴수록, 어둠 속에서 기사를 처리하는 아머레스 유니온이 조여 와요.
썩은 고목보단 새싹의 비료가 낫다면서요
그레이너티는 원래 칼리스카 가문 사람이에요. 남부 산림업으로 이름났던 기사 가문이죠.
어릴 적 할머니가 캐논랜스를 쥐여주며 가르쳤어요. "포격이 울리고, 승리는 눈앞에"라고. 썩어갈 바엔 새싹의 비료가 되겠다던 할머니는, 그레이너티를 가문의 좋은 새싹이라 불렀고요.
근데 감염되자, 그 가족들이 만장일치로 그녀를 내쫓았어요. 병이랑 상관없는 걸 뻔히 알면서, 가문의 쇠락을 전부 그녀 탓으로 돌리고요. 그날 편을 들어준 건 소나뿐이었대요.
아레나에서 그레이너티는 '녹슨 구리의 기사' 잉그라를 만나요. 감염자를 쓰레기라 부르며 아픈 데만 쑤시는 도살자를요. 그레이너티는 화난 척 연기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 그 콧대를 철저히 짓밟아요.
그리고 쓰러진 잉그라에게 포구를 겨눴다가…… 마지막 한 발을 조용히 하늘로 쏴요.
이 한 발은 관중에게 바친다. 너는 어울리지 않아.
— 그레이너티
삼 일 치 밥값이면 목숨도 건다는데요
이보나는 거친 갈기의 기사예요. 목청 크고 전투에 미친 데다, 배만 부르면 뭐든 하겠다는 단순한 성격이죠. 원래는 출정 기사가 되려던, 전쟁으로 일가를 잃은 우르수스 전쟁의 유족이고요.
상업연합회에 붙잡혀 있던 이보나를, 소나와 그레이너티가 몰래 보석금을 채워 빼내줘요. 정작 이보나는 그것도 모르고 "삼 일 치 밥값이랑 무기 수리비만 주면 목숨 걸겠다"며 가볍게 합류하죠.
근데 나중에 진실을 알고 빚지기 싫다며 둘을 쫓아가요. 그러다 소나가 감염자 아이를 헌터들로부터 몸으로 막아주는 걸 봐요.
그 순간 이보나는 웃으며 말해요. 왜 거절하냐고. 겁나 멋있는데.
사실 이보나의 콤파운드랜스는 아레나에서 한 번도 부러진 적이 없어요. 누구의 목숨도 진심으로 뺏을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기사가 되면 고향에 돌아가겠다 약속했는데요
저스티나는 송곳니의 기사, 말수 적은 저격수예요. 늘 말을 절반만 하고, 풀피리를 부는 시골 소녀였죠.
고향 사람들에게 금의환향하겠다 약속하고 떠났는데, 그랜드 나이트 영지로 오는 길에 감염되고 말아요. 감염자라 기사 등록도 거부당하고, 3주를 떠돌다 암시장 경기로 겨우 등록금을 모았고요.
피누스 실베스트리스에 합류한 뒤, 저스티나는 상처 입은 '플라스틱의 기사'를 병원에서 빼내와요.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이인데도요. 그에겐 돌아갈 집이, 기다리는 아들이 있으니까요.
저스티나에겐 그게 없어요. 기사 저스티나에겐 고향이 있지만, 감염자 저스티나에겐 갈 곳이 없거든요.
풀피리의 선율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거야. 저스티나를 여전히 순수하고 평범한, 그저 기사를 꿈꾸는 소녀로 남겨두고 싶으니까.
— 저스티나
빛의 기사가 아레나 벽을 부수고 돌아왔는데요
그리고 카시미어에, 오래 떠나 있던 별이 돌아와요. 마가렛 니어, 빛의 기사예요.
돌아오자마자 삼촌 무에나와 검을 맞대요. 니어 가문의 가훈은 "고난과 어둠을 두려워 말라". 근데 삼촌은 오래전에 영광을 포기하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자신을 내던진 사람이죠.
여동생 마리아는 언니를 위해 자기 점수를 넘겨주겠다 해요. 사실 자긴 기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그저 이 집이 여전히 우리 집이길 바랄 뿐이라고요.

그래도 마가렛은 다시 토너먼트에 나가기로 해요. 아무도 그 결정을 이해 못 해도요. 빛이란 건 어둠을 몰아내려는 게 아니라, 길 잃은 사람에게 새 길을 비춰주는 거니까요.
그게 지금의 카시미어라 해도, 믿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거다.
— 마가렛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거물이 됐는데요
말키위츠는 어제까지 월세를 걱정하던 평범한 직원이었어요. 감염자 기사들을 기사단에 연결해주던, 이름 없는 연락 담당이었죠.
근데 어느 거물의 변덕으로 전화 한 통을 받고, 하루아침에 상업연합회의 대변인이 돼버려요. 맞춤 정장을 입고, 초대장을 들고, 간담회에 들어가는 '거물'로요.
본인은 아무리 봐도 이 옷이 안 어울린다는데, 주위 사람들은 이미 그를 거물로 봐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요. 정장에 술이 쏟아져도 벗지 못하던 말키위츠는, 결국 이렇게 중얼거려요.
이젠…… 왠지 이 옷을 벗어버릴 수 없는 것 같군요.
— 말키위츠
기사를 동경하다가 기사 킬러가 됐는데요
마지막 이야기는 앞길이 창창하던 어느 궁수의 거예요. 활도 잘 쏘고 얼굴도 예쁘고, 회사 방침에도 고분고분한. 곧 기사 칭호를 받을 유망주였죠.
근데 승부조작, 근거 없는 스캔들, 멋대로 바뀌는 일정에 그녀는 이미 기사라는 게 질려버렸어요. 상품은 팔리면 끝이라도 나지, 자긴 뭐냐면서요.
그러다 전화 한 통을 받아요. 간단한 '테스트'만 통과하면 더 좋은 일자리를 주겠다는. 테스트는 지난 상대를 저격하는 거였고, 그녀는 방아쇠를 당겨요. 그렇게 아머레스 유니온의 일원이 되죠.
얼마 뒤, 흔들리던 선대 '플래티넘'이 목표를 지키려다 죽어요. 라주라이트는 그녀 손에 배지를 쥐여주고 말해요. 네가 플래티넘 해.
그녀는 이사 한 명을 소리 없이 처리하고, 창밖의 그랜드 나이트 영지를 봐요. 이사들조차 갈아치울 수 있는 꼭두각시고, 보이지 않는 손이 카시미어라는 높은 탑을 계속 쌓아 올리고 있다는 걸요.
쉬고, 싶다……
— 플래티넘
그래서, 누구를 위한 빛일까요
웃는 낙천가도, 쫓겨난 귀족도, 굶주린 전사도, 말수 적은 소녀도, 돌아온 별도, 얼떨결의 거물도, 지친 킬러도…… 다들 같은 도시의 같은 기계에 물려 있어요.
그리고 그 기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어요. 소나가 그토록 지키려던 감염자 은신처마저 발각되고, 이야기는 그 한복판에서 멈춰요.
아레나의 조명은 오늘도 꺼지지 않아요. 그 눈부신 빛 아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묻고 있고요. 이 빛은, 대체 누구를 위한 걸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