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곤 이버트 지역, 이름 모를 마을. 접선하러 온 로도스 아일랜드의 헤비레인과 세사 앞에 나타난 건 약속한 상대가 아니라, 리프스팁 암시장을 주무른다는 낯선 정보상이었어요.
코드네임 '샌드솔저'. 오퍼레이터는 무사하다, 물건에도 손 안 댔다 — 여유롭게 협상을 트는 이 남자가 딱 하나 알고 싶어 한 건, 두 사람의 계약서에 적힌 이름 하나였어요. 켈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이야기는 22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불타는 사르곤 마을, 눈 덮인 우르수스 요양원, 눈 내리는 빅토리아의 무도회장 — 켈시가 스쳐 간 자리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복수와 약속을 짊어지게 됐어요.
1. 낯선 정보상의 뻔뻔한 협상법
매복인 줄 알고 칼부터 뽑은 헤비레인. 하지만 상대는 태연하게 두 손을 들며 사르곤어로 인사를 건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두 분.'
이버트의 온갖 무장 사건 배후, 리프스팁 암시장 최고의 정보상 — 다들 그를 '샌드솔저'라고 불러요. 그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실험 재료도, 오퍼레이터들도 건드리지 않았다며 되레 여유를 부려요. 원하는 건 그저 대화뿐이라면서요.
치료를 조건으로 내걸며 스스로 감염자라 밝히는 남자. 세사가 캐묻자 못 이기는 척 진짜 용건을 꺼냅니다 — 자신도 '켈시'라는 이름을 쫓고 있다고.
복수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은 복수를 꿈꾸고 있을 겁니다. 그 상대가 뭐가 됐든.
— '샌드솔저'
심지어 3년 전 이버트 아미르를 불태워 죽인 것도 자신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이 남자. 그런데 그가 되묻는 질문 하나에 세사의 표정이 굳어요.
'혹시 당신들에게 금화 한 닢을 건네지 않던가요? 사르곤의 고대 금화를요.' 그 말과 함께, 이야기는 22년 전으로 넘어갑니다.
2. 불타는 레드혼 마을, 시체를 업은 소년
22년 전, 사르곤 이버트의 레드혼 마을. 컬럼비아의 비밀 연구팀 '샌드솔저' 부대가 매복에 걸려 전멸해요. 살아남은 건 열몇 살 소년 엘리엇 글로버뿐, 등에는 죽은 은사 쏜 교수의 시신을 업고 있었어요.
소년을 쫓는 건 아미르의 용병들, 살카즈 용병들, 심지어 사르곤 군부까지 — 모두가 노리는 건 소년이 안고 있는 은색 상자예요. 결국 용병 하나가 상자를 빼앗고 소년을 죽이려는 순간, 눈앞에서 괴물이 나타나 용병을 꿰뚫어 버려요.
괴물의 이름은 Mon3tr. 그 주인은 자신을 켈시라고 소개하는 정체불명의 여자예요.
'엘리엇, 이젠 괜찮아.'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묻는 소년에게, 켈시는 애도할 시간조차 아까울 만큼 담담하게 대답해요.
'네 은사님의 유산이 권모술수를 쓰는 자들 손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낸 것만으로도 넌 충분히 잘한 거야.' 소년은 그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아요. 사실 소년이 업고 있는 시신은 은사만이 아니라, 함께 사르곤에 왔던 백여 명의 동료 연구팀 중 유일하게 수습된 흔적이었어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엘리엇은 얼떨결에 켈시와 Mon3tr를 따라 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3. 의사 겸 고문 — 17년 전, 우르수스의 복수 계획
시간은 훌쩍 뛰어 17년 전 우르수스. 마을 의사로 지내는 켈시 앞에 옛 제자 릴리아가 찾아와요. 남편을 앗아간 '체르노보그 사고'의 배후, 바냐 대공을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들고서요.
릴리아는 이미 요양원 잠입까지 마친 상태예요. 보안 책임자를 매수해 실습생으로 위장해 들어갔고, 대공이 매일 오후 일광욕을 즐기는 자리까지 다 파악해 놨어요.
필요한 건 켈시의 손, 그리고 죽어서도 흔적이 남지 않을 독약뿐. 켈시는 만류하지만 릴리아의 대답은 단호해요.
루이자는 '아빠'라는 말도 채 배우지 못했다고요.
— 릴리아
딸 루이자를 남에게 맡기고 복수에 뛰어든 릴리아. 켈시는 결국 부탁을 받아들이며 약속을 하나 남겨요 — 무슨 일이 있어도 루이자를, 그리고 릴리아의 옛 동료 류드밀라까지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릴리아는 하인으로 위장한 켈시를 요양원 깊숙이 밀어 넣습니다.
4. 손가락 한 마디와 꽃 한 송이
요양원엔 마침 반가운 손님이 와 있어요. 우르수스의 신임 재무대신 위트 — 실명한 노병 친구를 문병하러 온 거예요. 위트는 자기 손으로 사과를 깎겠다며 친구에게서 억지로 칼을 빼앗다시피 해요.
그런데 그 노병, 대뜸 자기 왼손 둘째손가락을 잘라 위트에게 건네요. 전쟁통에 만신창이가 된 오른손 대신, 스스로 잘라낸 왼손 손가락만이 자신이 남긴 유일한 '혈육'이라면서요. 고향 흙에 묻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요.
그 소동 덕분에 경비가 흐트러진 사이, 켈시는 하인 신분으로 대공의 방에 들어가는 데 성공해요. 눈이 먼 바냐 대공은 자신을 죽이러 온 자를 알아채고도 담담해요. 오히려 창밖 풍경을 그려 달라 부탁하죠.

대공은 죽어가면서 우르수스를 상징하는 꽃 '파인릴리' 이야기를 들려줘요. 그 꽃이 자신이 저지른 온갖 죄를 대신 받아준 땅에서 자란다고 믿으면서요. 켈시는 그 변명을 자비 없이 잘라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용서할 자격도 당신에겐 없는 것 같군요. 우르수스가 당신을 잊기 바랍니다, 대공님.
— 켈시
대공은 그렇게 조용히 잠들듯 숨을 거둬요. 릴리아는 임무를 마친 켈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요.
켈시는 짧게 답할 뿐이에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린 언젠가 이 제국을 다시 마주할 날이 올지도 몰라.'
릴리아는 그 말을 뒤로하고, 딸 곁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러요. 두 사람은 그렇게 각자의 길로 흩어집니다.
5. 13년 전, 눈 내리는 밤의 무도회 — 첫사랑은 아니고요
다시 시간이 흘러 13년 전 빅토리아. 변경의 토룬 카운티, 빈센트 백작의 신년 파티에 라테라노의 수도사 '켈시'가 초대돼요. 그 자리엔 몰래 어머니 옷을 훔쳐 입고 숨어든 소녀 하이디도 있었어요.
톰슨 가의 외동딸 하이디는 켈시를 보자마자 얼어붙어요. 진저비어 한 잔에 얼굴이 빨개지고 옆자리를 자청해 앉는 등, 티 나는 짝사랑을 숨기지 못하죠. 그런데 켈시가 대뜸 우르수스의 '대반란'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면서 분위기가 묘해져요.

실은 켈시와 하이디의 아버지 톰슨은 이미 한배를 탄 사이였어요. 각지의 정보가 담긴 편지를 주고받으며, 빅토리아 대공작들 사이의 내란을 막으려는 거예요. 두 통의 편지 — 하나는 빅토리아, 하나는 '카즈델'에서 왔다는 말에 켈시의 표정이 살짝 굳어요.
'무슨 일 있니?' 그 질문에 하이디는 대답 대신 편지 두 통을 내밉니다. 아직 앳된 소녀의 어깨 위에, 어른들의 음모가 조용히 올라앉는 순간이에요.
6. 검은 눈이 내리던 밤, 정체는 '황제의 칼날'
저택 안이 다시 시끌벅적해질 무렵, 켈시의 표정이 굳어요. '검은 눈.'
하이디에겐 보이지 않는 그 눈이 내리자, 켈시는 정원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경고해요. 적이 왔다는 신호였어요.
정원에서 기다리는 건 우르수스 황제의 근위병, 일명 황제의 칼날. 인간의 몸에 '데몬'의 힘을 봉인한 이 존재는, 바냐 대공을 죽인 반역자를 처단하러 왔다며 검을 뽑아 들어요.

켈시는 물러서지 않아요. 오히려 근위병의 정체와 우르수스 군부의 속사정까지 낱낱이 짚어내며 말로 밀어붙여요. Mon3tr까지 가세한 싸움 끝에, 상처 입은 근위병은 결국 검을 거둡니다.
근위병이라면 합리적인 판단을 할 거라 믿는다. 난 단지 그의 죽음을 편안하게 해줬을 뿐이다.
— 켈시
황제의 칼날은 물러나며 한마디를 남겨요.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켈시는 눈밭에 흔적을 지우며 하이디에게 뒷일을 맡겨요 — 아버지와 함께 이 진실을 묻어달라고, 그리고 언젠가 자신을 대신해 빅토리아를 지켜달라고요.
7. 늙은 점술가는 자신의 이름도 잊었다
다시 22년 전 사르곤. 켈시와 엘리엇은 밤낮으로 쫓기며 리프스팁 암시장을 향해요. 가는 길목마다 살카즈 용병들과 마주치는데, 켈시는 놀랍게도 '살카즈 모 부족 언어'로 그들을 회유하려 들어요.
협상은 결렬되고 전투 끝에 용병은 목숨을 잃어요. 죽어가는 그에게 켈시가 건넨 말은 위로도 협박도 아닌, 살카즈의 터전 '카즈델'이 지금 지어지고 있다는 담담한 소식이었어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프스팁의 안내인, 스스로를 '늙은 이신'이라 칭하는 사브라 노인이 다가옵니다. 100년 넘게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거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묘한 노인이에요.
사막 한복판에 우뚝 선 이동도시,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던 젊은 파디샤 — 매일 밤 같은 꿈을 꾸면서도, 정작 그 파디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고 이신은 하소연해요.

켈시의 몇 마디 힌트만으로, 이신은 자신이 옛 파디샤 나이츠모라를 섬기던 신하였다는 걸 떠올려요. 잊고 있던 기억이 눈물과 함께 터져 나오지만, 결국 진짜 궁금한 건 묻지도 못한 채 무너져요. 켈시는 그런 이신에게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금화 한 닢으로 약속을 남깁니다.
8. 상자를 깬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소년이었다
리프스팁에서 여정을 준비하는 사이, 엘리엇은 켈시에게 뜻밖의 제안을 해요. 상자 속 오리지늄 샘플을 넘겨줄 테니, 자신을 위해 복수해 달라고요.
켈시는 대답 대신 되묻습니다. '내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강요할 생각은 없다고, 지금의 오리지늄 기술로는 그 샘플 하나로 큰 위협이 될 수 없다고 덧붙이면서요.
그 순간 엘리엇은 결국 스스로 상자를 깨뜨려요. 위험한 오리지늄 결정을 자기 손으로 직접 부순 거예요. 놀란 켈시가 몸을 던져 막으려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감염자를 미워하나요? 마침 잘됐네요, 이렇게 하면 더는 신세 질 필요 없으니까!
— 엘리엇
켈시의 대답은 단 한마디. '나도 감염자야.'
그 말에 엘리엇은 오히려 분노를 터뜨려요. 자신이 감염된 것도, 살아남은 것도, 전부 켈시가 정해준 대로 흘러간 것 같다면서요.
'누구도 타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어.' 켈시는 결국 엘리엇에게 선택지를 돌려줘요 — 우르수스로 함께 갈지, 사르곤에 남아 복수를 계속할지. 엘리엇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엘리엇은 사르곤에 남아요. 이신의 도움을 받으며 사르곤부터 컬럼비아까지, 이번 일에 얽힌 모두를 한 명씩 찾아내겠다고 다짐하면서요.
늙은 이신은 그런 소년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려요. '이 아이는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켈시 님.' 켈시는 그 결정을 존중한다는 말 외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어요.
에필로그. 새로운 이름, 그리고 같은 약속
그렇게 22년이 흘러요. 리프스팁 암시장의 정보상 '샌드솔저'는 사르곤에 얽힌 원수를 하나씩 지워나갔고, 마침내 로도스 아일랜드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어요. 진료실 문을 열자, 그 안엔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켈시가 있었어요.
빅토리아 사무소에서 소포 하나가 도착해요. 발신자는 하이디 톰슨, 정보 저장 장치가 담긴 소포예요.
켈시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저 서랍에 넣어둘 뿐이에요. 22년 전과 똑같이, 필요한 만큼만 알려주고 나머지는 침묵하는 방식으로요.
새 이름은 패신저. 22년 전 사르곤에 두고 온, 바로 그 엘리엇 글로버예요.
'여전히 기억력이 좋군, 엘리엇.' 켈시의 인사에 패신저는 살짝 인상을 찌푸려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죠. 비밀스러운 코드네임이라는 게 왜 있겠습니까.'
옛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 달라는 그에게, 켈시는 여전히 무심하게 답해요. '네 자신을 속일 순 있어도, 날 속일 순 없어.'
절 여기로 부른 '켈시'가 며칠, 몇 달, 몇 년 후에 갑자기 또 사라지는 건 아닌지……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 패신저
켈시는 쉽게 대답하지 못해요. 그 대신 박사를 만나러 가는 걸음을 재촉할 뿐이에요.
'{@nickname} 박사, 여기 있었군.' 아미야가 기다리는 현장으로, 로도스 아일랜드가 오늘도 출항합니다.
리프스팁 암시장의 정보상은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22년을 사냥꾼으로 살았어요. 그리고 그 끝에서 그가 찾은 건 새로운 원수가 아니라 낡은 계약서 한 장이었죠. 사막을 떠돌던 소년은 그렇게, 또 다른 이름으로 로도스 아일랜드에 승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