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사람이 남긴, 마지막 인사말이 있어요. 카즈델의 어느 함선 깊은 곳에서, 켈시는 그 목소리를 몇 번이고 다시 재생하고 있었어요.
1094년, 살카즈의 이동도시 카즈델에는 깃발이 두 개 있었어요. 하나는 종족의 벽을 허물자는 '바벨'의 깃발,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걸 되찾자는 '군사위원회'의 깃발이었죠.
그리고 그 사이엔, 만 년을 잠들었다 깨어난 존재가 하나 있었어요. 다들 그를 승리를 몰고 오는 은인이라 믿었지만, 정작 그가 진짜로 구하고 싶었던 건 이 별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1. 마족의 도시에, 이상주의자가 태어나다
카즈델은 살카즈들이 100년 넘게 끌고 다니는 이동도시예요. 영혼 용광로의 불빛 아래, 사람들은 전쟁과 차별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았죠.
카즈델을 지금의 모습으로 일으켜 세운 건 재봉사 테레시아와 검사 테레시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혼혈 쌍둥이예요. 사람들은 테레시아를 전설의 '여섯 영웅' 중 하나로 떠받들지만, 정작 그녀는 그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테레시아는 종족과 국가의 틀을 넘는 조직 '바벨'을 세워요. 이름은 거창하지만 목표는 단순해요. 카즈델의 아픈 사람을 돌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물론 다들 반가워하진 않았어요. 지하 시장 '흉터의 상점'을 굴리는 애꾸 거인 '스카 아이'는, 전쟁이야말로 진짜 밥줄이라 믿는 사람이었거든요.
언제부터, 살카즈가 전쟁과 떨어져 살았다는 거냐!
— '스카 아이'
게다가 스카 아이에게는 남다른 재주가 하나 있어요. 미래를 조금씩 엿보는 예언 아츠인데, 정작 본인은 그걸로 돈만 벌 뿐 자기 운명은 자기가 비틀 수 있다고 믿었죠.

2. 만 년 잠든 손님을 깨우다 (책임은 못 짐)
바벨의 진짜 수장은 사실 둘이에요. 마왕 테레시아, 그리고 그녀 곁의 정체불명의 존재 켈시.
켈시는 오리지늄 문제를 풀어줄 사람이 있다며, 아무도 모르게 봉인된 관 하나를 열어요. 그 안에서 깨어난 건 만 년 전 어느 멸망한 문명에서 온, 스스로를 '박사'라 부르는 존재였죠.
박사는 낯선 별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빠르게 적응해요. 켈시는 그런 그를 보며 안도하지만, 정작 박사의 표정에는 말로 꺼내지 못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어요.
켈시는 박사의 존재를 바벨 사람들에게도 한동안 숨겨요. 테레시아와 박사,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에게도 알릴 필요가 없다면서요.
박사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바벨 멤버들의 안전을 위해, 박사의 승선 기록은 지웠어.
— 켈시

3. 버든비스트에서 떨어진 아이 한 명 (박사 포함 두 명)
박사는 켈시의 배려로 반년간 테라를 여행해요. 그러다 화물 수송대 사고 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카우투스 여자아이, 아미야를 만나죠.
아미야는 샌드비스트를 쫓아내겠다며 되지도 않는 울음소리를 흉내 내는 아이였어요. 박사가 진짜 휘파람으로 문제를 해결하자, 아미야는 눈을 반짝이며 자기도 해보겠다고 나서요.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버든비스트 등에 올라탄 박사는, 몇 분 뒤 물웅덩이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거든요.
이미…… 최대한 꽉 잡고…… 있어!
— 박사

동행하던 카우투스 용병 새비지는 아미야를 두고 갈라서기 아쉬워하지만, 박사는 결국 말없이 밤사이 자리를 떠요. 아미야를 더 위험한 곳으로 데려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아미야는 그런 박사에게 다시 만날 날을 약속받고 싶어 해요. 몸에 돌이 자라난 아이에게 남은 미래가 얼마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면서도, 계속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죠.
아미야, 우리에겐 미래가 있을 거야.
— 박사
4. 폭풍 속에서 주운 칼자루 두 자루
테레시스에게는 제자가 둘 있어요. 눈보라 속에서 발견된 야생아 아스카론, 그리고 군사위원회 부양소 출신 맨프레드.
둘의 사이가 나쁘진 않아요. 정확히는, 아스카론이 맨프레드를 매번 밧줄로 꽁꽁 묶어 매달아 놓는 관계에 가깝죠. 그런데도 맨프레드는 늘 다시 도전장을 내밀어요.
테레시아는 그런 아스카론에게 유독 다정했어요. 뿔을 만져보라며 자기도 살카즈라 다르지 않다고 다독여주죠. 아스카론이 유일하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상대가 바로 테레시아였어요.
날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난 네게 적의를 갖고 있지 않아. 그렇지? 내 뿔 한번 만져 봐, 우린 다 똑같아.
— 테레시아
다만 자라면서 둘의 길은 갈라져요. 아스카론은 바벨의 자객이 되고, 맨프레드는 군사위원회의 장관이 되죠.

5. 두 개의 깃발, 갈라지는 형제자매
테레시스는 카즈델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며 '군사위원회'를 세워요. 옛 왕정들의 특권을 없애고, 살카즈를 하나의 힘으로 뭉치려는 시도였죠.
문제는 그 대가예요. 카즈델의 오랜 원한을 품은 이들에게 이종족과 함께 사는 바벨은 눈엣가시였고, 결국 폭동과 암살이 잇따라요.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 뒷골목 소년 오다가 있어요. 원래 그 이름은 크게 다친 어머니 것이었는데, 아버지 행운이 복수하러 떠나며 아들에게 그 이름을 물려줬어요. 아들을 통해서라도 그 이름을 계속 부르고 싶었던 거겠죠.
몇 년 뒤, 다 자란 오다는 이종족 옹호론자 '선생님'을 몰래 숨겨주는 사이가 돼요. 그런데 하필 그 선생님을 죽이라는 의뢰를 받은 자객이, 다름 아닌 아버지 행운이었죠.
행운은 아들이 지키려던 사람인 걸 알면서도, 결국 칼을 거두지 못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운 자신도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죠.
이런 소요는 결국 바벨 사무소가 포격을 맞는 참사로 번지고 말아요. 바벨은 18년 전의 전쟁 이래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카즈델을 떠나기로 결정하죠.
이 와중에 밴시의 여왕 라케라말린은 테레시아에게 자기 딸 아이파닐을 부탁해요. 복선은 이렇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죠.

6. 박사의 비밀 일기 (여기부터 농담은 없습니다)
박사에게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기록이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홀로 되뇌는 그 말들 속엔, 만 년 전 잃어버린 문명과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이 담겨 있었죠.
박사의 진짜 목적은 '오리지늄'이 이 별을 완전히 뒤덮는 거예요. 그것만이 만 년 전 스러진 문명이 다시 이어질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거든요.
테레시아가 오리지늄으로 사람을 살리려 애쓸수록, 박사의 속은 타들어 가요. 자신이 정말 구원자인지, 아니면 이 별의 마지막 숨통을 조르는 자인지, 그는 답을 내리지 못해요.
프리스티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 박사
정작 켈시는 그런 박사의 몸이 갈수록 야위어가는 걸 걱정할 뿐이에요. 박사가 자기 몸에 오리지늄을 직접 주입해가며 실험하는 걸 알고, 스카우트까지 동원해 애써 말려도 봤지만 박사가 듣지 않았거든요..
지금 이 순간 네가 자신을 소모시키길 원하진 않아. 자신을 조금 더 소중히 여겨.
— 켈시
박사가 진짜 지치는 이유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어요. 오래전 잃어버린 연인 프리스티스와 나눴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켈시와 테레시아를 속여야 한다는 죄책감이 그를 갉아먹고 있었죠.

7. 빗속의 영웅상 아래서 오간 거래
박사는 몰래 테레시스를 찾아가요. 카즈델을 세운 쌍둥이의 동상 아래,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거래를 시작하죠.
박사가 내건 조건은 단순해요. 오리지늄을 다루는 기술을 넘겨줄 테니 바벨을 무너뜨리고 테레시아를 자기 계획에 합류시키라는 것. 정작 테레시아를 죽이라는 조건을 내건 건 테레시스였죠.
테레시스는 되묻죠. 무엇을 파괴해야 그가 원하는 사다리를 만들 수 있느냐고. 박사는 그게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너무 오래 망설였다고 답해요.
무엇을 파괴하여 사다리를 만들 것이냐, {@nickname}.
— 테레시스
테레시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한마디를 남겨요. 살카즈의 운명을 갖고 노는 자가 있다면, 자신이 직접 심판하겠다고.
높은 곳에서 남들을 내려다보는 악령을 제재할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된다면, 내가 나서겠다.
— 테레시스

8. 카운트다운, 그리고 스스로 지운 방어벽
이 무렵 아스카론은 오래된 빚 하나를 청산해요. 배신의 냄새를 팔아 온 흉터의 상점 두목 스카 아이가, 결국 자기 부하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거든요. 아스카론은 그 숨통을 마지막으로 끊어주고 옵니다.
바벨은 그 사이 마침내 카즈델 탈환 작전에 나서요. 테레시스의 주력이 빅토리아 런디니움으로 떠난 틈을 노린, 다시없을 기회였죠.
작전은 박사의 지휘 아래 흠 잡을 데 없이 흘러가요. 카운트다운이 줄어들수록 바벨의 옛 동료 에이스, 스카우트, 만트라, 피스, 로고스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완벽하게 움직여요.
그런데 정작 본함이 가장 무방비해지는 순간, 방어 시스템을 스스로 해제한 것도 박사였어요. 테레시스가 보낸 자객들이 소리 없이 함선에 올라타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는 아미야는 그림책을 품에 안고 테레시아의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9. 왕관을 넘겨받은 아이
자객들이 들이닥치자, 테레시아는 아미야를 검은 거품으로 감싸 재우고 홀로 그들과 맞서요. 쓰러뜨리면서도, 그녀는 하나하나 그들의 이름을 불러줘요. 루카, 리엔스, 레빈……
뿔과 이름을 스스로 지워버린 자객들이지만, 그녀만은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나는 당신들의 이름을 기억해.
— 테레시아
마지막 힘을 다해, 테레시아는 자신의 '검은 왕관'을 잠든 아미야에게 옮겨요.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박사에게 묻죠, 아미야를 찾으러 온 거냐고, 아니면……
박사는 대답하지 못해요. 그의 등 뒤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객들이, 이미 답이었거든요.
이게 너의 대답이었구나, 박사……
— 테레시아

죽어가면서도 테레시아는 박사를 원망하지 않아요. 대신 그의 기억을 한 올 한 올 지워버리죠, 그가 다시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너 자신을 찾아.
— 테레시아
안녕, 그리고 시작
테레시아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켈시를 기다려요. 그리고 잠든 아미야의 몸을 빌려, 딱 한 번 마지막 인사를 남기죠.
난 그를 죽였고, 그를 구하기도 했거든.
— 테레시아(아미야의 몸으로)
왕관은 통치자도, 족쇄도 아니라고 그녀는 말해요. 그건 그저 '문명의 존속'으로 향하는 열쇠일 뿐이라고, 아미야에게는 아직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죠.
켈시는 박사를 로도스 아일랜드 밖, 우르수스의 체르노보그로 보내기로 해요.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뜰 그를, 더는 위험 속에 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뒤늦게 도착한 아스카론은 텅 빈 방 앞에서 무너져요. 이번만큼은, 아무리 기다려도 전하가 마중 나오지 않았거든요.
젠장! 젠장! 녀석들이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약속할게.
— 아스카론
그리고 이야기는 196년 전으로 돌아가요. 늙은 마왕이 죽은 폐허 위에서, 아직 어렸던 재봉사와 검사가 처음으로 왕관을 나눠 쓰던 그날로.
우리는 영원히 평등하다.
— 테레시아 · 테레시스

이 이야기가 유독 씁쓸한 건, 사실 우리가 이 결말의 다음 장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기억을 잃은 채 눈을 뜬 그 박사가, 지금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우리가 부르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걸요.
그리고 아스카론의 복수도, 아미야가 짊어진 왕관도, 모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예요. 다만 그 뒷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이 별에 몇 남지 않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