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델에서 태어난 살카즈 용병들에게, 이름은 사치예요. 다들 어차피 죽거나 잊힐 거라, 굳이 서로의 이름을 외우려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름은 죽은 사람의 몫으로 남아, 다음 사람에게 그대로 넘어갑니다. 저격수 'W'가 후방에서 싸우다 전사하던 날, 그 이름을 주워 든 낯선 여자가 나타났어요.
몇 년 뒤, 그녀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물어봐 준 사람을 잃고, 그 사람을 앗아간 것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1. 죽은 용병의 이름을 주워 입다
살카즈 용병단을 이끄는 외드레르와 부대장 이네스는 방금 전투에서 코드네임 'W'를 잃었어요. 후방에서 시간을 벌어주다 전사한 저격수였죠.
퇴각하던 길, 낯선 살카즈 여자가 걸어서 뒤를 쫓아옵니다. 누더기 차림에, 손에는 죽은 W의 칼과 총.
이네스는 당장 죽이자고 하지만, 외드레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여자가 도중에 몇 번이나 그에게 일부러 돌을 던졌다는 걸 눈치챘거든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출신 불명의 살카즈인을 받아줄 리 없지.' 이네스가 쏘아붙이자 외드레르는 웃습니다. '그래, 그게 너와 나의 다른 점이란 거다.'
'전사자의 무기를 인계받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외드레르가 묻자, 여자는 망설임 없이 답합니다. '물론.'
그렇게 그녀는 죽은 용병의 이름과 무기를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카즈델에서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살카즈가 죽은 이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2. 네 목엔 사탕이 몇 개야?
몇 개월 뒤, 암살자의 시체에서 암호가 적힌 쪽지가 나와요. 사람 이름 대신 가명과 코드네임, 그 옆에 사탕 그림이 몇 개씩 그려져 있었죠.
'사탕 개수는 현상금이야. 가장 많이 가진 녀석의 목이 제일 비싸다는 뜻이지.' 외드레르가 설명하자, 새로운 W가 자기 항목을 찾아냅니다. '이전 녀석, 계산 완료. 새로운 녀석, 귀찮음, 10개, 상황에 따라 추가.'
'너에 대한 평가가 꽤 후한 모양이군.' '지난달에 내가 숲속에 무기상들을 생매장해서 그런가 보지.'
외드레르는 죽은 전임 W 이야기도 들려줘요. 라테라노인을 죽이고 총을 얻은 날을 멋대로 '생일'로 삼았던, 늘 실실 웃으면서도 말속에 뼈가 있던 괴짜였다고.
'그 녀석에겐 집념이 있었다. 남이 파둔 함정에 잘 빠지는, 그런 부류였지.' '그건 그냥 멍청한 거잖아.'
그날부터 W는, W가 되었다.
— 외드레르

3. 백병전 강의료는 팔뚝 하나
모닥불 앞, 이네스가 새 W에게 슬쩍 캐물어요. '우리 팀에 들어오기 전엔 어디 소속이었어?' '뭐야, 이제 와서 면접이라도 보겠다는 거야?'
W가 이네스의 약점을 건드립니다. '근접전에 그렇게 약하다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네스의 검이 W의 팔을 스쳐요.
'백병전에 약한 줄 알았는데, 살짝 방심했나 보네.' W는 웃으며 인정합니다. '팔에 상처 하나로 배운 교훈이면 싸게 먹힌 셈이지.'

농담도 잠시, 새로운 임무가 떨어져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운송팀을 호위하라는 것. 목적지도, 화물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그때 외드레르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해요. '네 아츠로 운송팀을 탐색하는 건 계약 위반이다. 저들을 얕보지 마라.'
호위 도중, 이네스는 저도 모르게 아츠로 운송팀을 훑어보고 말아요. 거대한 그림자 — 배도 아니고, 뭔가의 '프레임' 같았습니다.
4. 자작나무 숲, 그리고 프레임의 정체
카즈델 북쪽엔 자작나무 숲이 있어요. 봄에 태어나 겨울이면 죽는, 오직 오리지늄 결정만이 달빛 아래 남는 땅이죠.

그 숲 근처에서 매복을 당해요. 팀은 뿔뿔이 흩어지고, 정신을 잃은 이네스 곁엔 W만 남습니다.
'널 미끼로 쓰려고 살려뒀다면?' '지금 상태로 너랑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둘은 서로를 믿지 않으면서도, 등을 맞대고 싸워요.
정체 모를 정예병들이 끝없이 밀려듭니다. 카즈델 전체를 상대하는 기분이었죠.
정예병 하나가 W를 붙잡고 회유하려 해요. '장군님께서 널 마음에 들어 하실 거다.' W는 코웃음을 칩니다. '쓰고 버리기 편한 일회용품이라고 말하는 게 맞지 않아?'
5. 전장 한복판에서 태연한 여자
포위망 한가운데,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나요. 굉장히 기이한 사람이었죠. 살카즈도 아닌데, 전쟁터 중심에서조차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거든요.
이네스는 떨고 있었어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떨게 만드는지, W는 알 수 없었습니다.

6. 고장 난 문 하나 못 고치는 여왕님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함선 위였어요. 임시로 부상자를 받아준 운송팀 본대, 이름하여 '로도스 아일랜드'.
복도를 돌아다니던 W는 자동문과 씨름하는 엔지니어를 만나고, 그 옆에서 함께 골머리를 앓는 정체불명의 여자를 만나요. '테레시아라고 불러줘.'
나는 모두를 잊고 싶지 않아. 잊어서도 안 되고.
— 테레시아
카즈델을 찬탈한 섭정왕과 맞서 싸운, 살카즈를 하나로 모은 그 테레시아가 고장 난 자동문을 고치고 있었어요. W는 웃음을 참지 못합니다.
테레시아는 W에게 진짜 이름을 물어요. 'W는 한 용병의 이름이잖아. 너를 나타내는 건 네 이름이지.' W에겐 답할 이름이 없었습니다.
'카즈델에서 태어난 살카즈에겐 흔한 일이야.' '언젠가 네가 W로 살지 않아도 될 때가 오면, 그때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될지도 몰라.'
켈시는 W를 병상으로 돌려보내며 경고해요. '여기 있는 모두가 너를 환영하는 건 아니야. 네 이력을 훑어봤거든, 꽤 위험하더라.' '그건 피차일반 아니야?'
복도 저편, 후드를 눌러쓴 또 다른 사람과도 눈이 마주쳐요. 다들 '박사'라 부르는 이였죠. W는 이유 모를 오한을 느낍니다.
7. 깃발은 쓰러져야 한다
외드레르는 켈시에게, 테레시아가 자신의 이름과 가족을 기억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해요. 그렇게 대다수의 살카즈가 로도스 아일랜드에 남기로 합니다.
떠나기로 한 건 외드레르와 이네스, 그리고 몇 안 되는 용병들뿐. 함께 시작했던 오랜 동료들 중, 살아남은 건 결국 둘뿐이었죠.
예전에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을 지키다 궤멸당했던 그 전투에서, 깃발을 쥔 건 한 아이였어요. 외드레르는 그 깃발을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난 그 깃발을 단 한 순간도 좋아했던 적이 없다.'
이네스는 아츠로 읽은 세 사람을 이렇게 정리해요. 테레시아는 슬픔 속에서도 강하고 온화했고, 켈시는 사람보다 기계에 가까워 보이지만 모두를 평등하게 대했다고.
체스말은 상자 안에 들어갈 뿐이잖아. 우리는 물건이야, 생명이 없는 물건.
— 이네스
그리고 '박사'라 불리는 마지막 한 사람은, 전쟁터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를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8. 전쟁은 너무 빨리 끝났다
몇 개월 뒤, 카즈델의 전세가 하룻밤 사이에 기울어요. 반년이나 버티던 전쟁이, 너무 빠르게 끝나버린 겁니다.
이 소식을 들고 W를 다시 찾은 곳은, 다름 아닌 그녀가 처음 태어난 그 폐허였어요. 완전히 무너져 있었죠.
W는 몰라보게 차분해져 있었습니다. 배신한 살카즈들을 하나씩 조용히 처리하며, 자신을 향한 이 모든 게 복수는 아니라고 잘라 말해요. '그냥 실업자의 화풀이라고 생각해.'
테레시아는 이미 죽었고, 섭정왕이 카즈델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셋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어요.
'카즈델에서 벗어나려면 지금이 기회야.' 외드레르가 W에게 말해요. 우르수스에서 부상하고 있다는 감염자 세력 — 리유니온에 숨어들자는 계획이었죠.


9. 탈룰라의 그림자는 두 개
리유니온에 숨어든 지 몇 달, W는 어느새 체르노보그의 야전 지휘관이 되어 있었어요. 겉으로는 침착해졌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이네스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리유니온 병사들은 실책을 물으며 W를 몰아붙여요. '우리는 협력 관계일 뿐이야. 내가 이 테이블을 뒤엎으면, 탈룰라가 좋아할까?' W는 태연하게 받아칩니다.
이네스는 리유니온의 지도자 탈룰라를 아츠로 들여다봐요. 한때는 순수한 저항의 상징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자기 손으로 자신이 쌓은 것을 무너뜨리고 있었거든요.
'그녀의 그림자…… 두 개야. 아츠의 흔적이 아니라, 오래된 폐허 같았어.' 이네스가 외드레르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죠.
W에게 알려야 한다며, 이네스는 처음으로 외드레르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뛰쳐나가요.
가는 길에 마주친 리유니온 병사가 그녀를 가로막습니다. '탈룰라에겐 있겠지.' 그 한마디 뒤, 거리 전체가 폭발했어요.
자작나무였구나…… 모든 게, 그곳 풍경과 비슷하네, 얽혀있는 그림자마저……
— 이네스
체르노보그의 가로수는 자작나무였습니다. 그녀와 외드레르가 처음 W를 주웠던, 그 숲과 똑같았어요.
10. 흩어지다
이네스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시체도, 적의 흔적도 남지 않았죠. 외드레르는 그 말을 전한 리유니온 병사를 그 자리에서 베어버려요.
그는 결심합니다. 섭정왕에게 직접 이 모든 사실을 보고하러, 빅토리아의 런디니움으로 떠나기로.
'넌 분명 죽을 거야.' W가 말리지만, 외드레르는 흔들리지 않아요. '테레시아 전하는 내 이름을 기억해 주셨다. 나도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거든.'
런디니움에서 그를 맞은 건 섭정왕의 고해신부였습니다. 섭정왕은 이미 로도스 아일랜드의 귀환도, W가 리유니온을 장악한 것도 다 알고 있었어요.
'아직 혼란이 부족해요.' 고해신부가 말합니다. 섭정왕은 리유니온을 없앨 생각이 없었어요. 오히려 더 큰 혼란의 불씨로 써먹을 속셈이었죠.
발이 묶인 외드레르는 카즈델의 폐허에 숨겨둔 비밀 송신소를 통해, 처음부터 준비해둔 방법으로 W에게 몰래 신호를 보내기로 합니다.
떠나기 전, W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어요. '용병의 생명은 돈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거야?' '전쟁이 정한다.' '그런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모든 살카즈 용병들은 자기 자신의 가격을 스스로 정해야 해. 남들이 매길 필요도, 남들한테 조종당할 필요도 없어.
— W
살기 위해
학살 이후, 조용해진 체르노보그의 폐허. W는 무기를 든 두 아이를 만나요. 다리를 다친 '루블레프'와, 겁 많은 친구 하나.
W는 병원에 남은 약을 알려주며, 겁 많은 아이 혼자 그곳에 다녀오라고 부추겨요. 루블레프는 필사적으로 말립니다. '걔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시간이 지나도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루블레프는 무너지기 시작해요. 원망과 불안,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 믿었던 마음까지.
'네가 걔를 구해줬으니, 걔도 널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W가 묻자 루블레프는 이를 악뭅니다. '걘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전부 걔 때문이야!'
이 세상에는, 타인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절대로.
— W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출신도, 신분도, 과거도 아니야. 살면서 받아온 영향, 그리고 그 신념을 얼마나 믿느냐지.' W가 말합니다.
죽어가던 순간, 친구가 구급상자를 들고 뛰어와요. 두 아이는 그제야 처음으로 서로의 진짜 이름을 물었습니다.
웃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W가 조용히 중얼거려요.
그렇지? ……탈룰라.
— W
이름 없이 태어난 여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주워 살아남았습니다. 그 이름을 지어줄 뻔했던 사람도, 그 이름을 지켜준 사람들도 잃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자기 이름의 값을 스스로 매기기 시작했어요.
자작나무 숲에서 태어난 인연은, 같은 그림자 아래서 저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지금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