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는 '재앙'이라 불리는 천재지변이 대지를 할퀴고, 오리지늄이라는 광물이 부와 힘을, 동시에 광석병이라는 불치병을 함께 뿌리고 다니는 땅이에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그 감염자들을 치료하겠다며 사막을 항행하는, 바퀴 달린 제약회사고요.
그 로도스 아일랜드의 지휘관 박사가, 컬럼비아의 대도시 티카론토에서 습격을 당했어요. 일행은 뿔뿔이 흩어졌고, 박사는 리더 아미야와 함께 낯선 황야 한복판에 처박히고 말았죠.
근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지금의 박사는, 자기가 누구였는지조차 잘 모르거든요. 얼마 전 기억을 거의 다 잃었으니까요.
그리고 잠들 때마다, 어떤 목소리가 자꾸 속삭여요.
희망을 품는다는 건, 아주 잔인한 일이야.
— 누군가의 목소리
질문하면서 석궁부터 쏘는 경찰, 보신 적 있어요?
습격당한 도시에 남은 건 저공 비행체 조종사 딜런과, 필라인 오퍼레이터 블레이즈였어요. 조종석이 익숙한 딜런은 어쩌다 반 토막 난 석궁을 들고 뒷골목을 뛰어다니는 신세가 됐고요.
쓰러진 습격자는 '경찰'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공무원증은 누가 봐도 가짜였어요. 블레이즈는 어이없다는 듯 말하죠.
질문과 동시에 전자동 석궁을 쏘는 경찰이, 정말 있다고 생각해?
— 블레이즈
이들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쫓는 건, 티카론토 최대 기업 마마존스가 고용한 용병들이었어요. 목적은 로도스 아일랜드가 가져온 광석병 약품 샘플. 호텔에서 이미 상당수를 빼앗아 간 뒤였죠.
황야에서 눈을 떴더니, 철통 헬멧을 쓴 아저씨가 있었어요
간신히 도시를 빠져나온 박사와 아미야는 가스파르 황야에 떨어졌어요. 정신을 차린 박사 앞엔, 투박한 철통 헬멧을 쓴 사내가 있었죠. 자칭 장사꾼 캔낫, '미스터 굿이너프'라 불러 달래요.
캔낫은 오리지늄각뿔 두 개를 안내비로 받고, 두 사람을 가장 가까운 재앙정보전달자 거점까지 데려다주기로 해요. 남쪽으로 조금만 더 갔으면 독가스 늪에 처박힐 뻔했다면서요.
밤이 되자 아미야는 익숙하게 나물과 버섯을 골라 반합을 저었어요. 이동도시 사람 대부분은 야외 생존을 못 하는데, 아미야는 달랐죠. 몇 년 전, 박사가 직접 가르쳐 준 거라면서요.
박사는 그 기억이 없어요. 아미야는 잠깐 쓸쓸하게 웃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반합을 저었어요.
박사님이 여기 이렇게 있는 한, 언젠가는 다 좋아질 거예요.
— 아미야
감염자에게 나눠주는 '억제제', 사실은 진통제였어요
거점에 도착한 캔낫은 박사 일행을 마마존스의 개척대 사무소로 데려가요. 거기선 황야를 개척하는 감염자들에게 매달 '광석병 억제제'를 배급하고 있었죠. 그런데 아미야가 받아 든 약은, 억제제가 아니라 진통제와 영양제였어요.
마마존스는 원래 도넛 체인점이었대요. 약품 기술이 없으니 남의 생산 라인을 사들이고, 진통제를 억제제라 속여 팔아 온 거예요. 로도스의 샘플까지 손에 넣으면, 더 그럴듯한 가짜 '희망'을 만들 수 있고요.
캔낫은 담담하게 말해요. 진실을 알려준들, 당장의 진통 효과 앞에서 진실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잠꼬대 속 그 목소리와 똑같은 이야기를요.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컬럼비아로 와서, 희망 속에 가치를 만들어 내고, 희망 속에서 죽어 가요.
— 캔낫
그래도 아미야는 이걸 그냥 지켜볼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박사는, 조용히 캔낫에게 뭔가를 부탁했죠.
적한테서 물건을 뺏는 대신, 박사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어요
며칠 뒤, 박사는 컬럼비아 구치소에서 걸어 나와요. 박사가 한 일은 이거였어요. 국경관리국에 '우리 기업이 광석병 약품을 밀수했다'고 스스로 자수한 거예요.
컬럼비아에서 광석병 약품은 가장 엄격히 관리돼요. 관리국은 규정대로 밀수품, 그러니까 그 샘플을 전부 압수해 폐기하죠. 마마존스가 로도스의 기술로 가짜 억제제를 업그레이드하는 길이, 그렇게 막힌 거예요. 대가는 박사의 3일 구류였고요.
떠나기 전 캔낫은 유쾌한 여행이었다며 작별을 고해요. 근데 이 능글맞은 장사꾼에겐 다른 얼굴이 있었어요. 그가 데리고 있던 건 황야의 무법자 '녹슨 망치'의 무리였거든요. 그마저도, 박사는 진작 눈치채고 있었죠.
폭풍 한복판으로 배를 몰라니, 그거 자살 아니에요?

로도스 아일랜드로 돌아온 박사를, 의사 켈시가 맞아요. 켈시는 한 달간 박사의 뇌를 일곱 번이나 스캔했어요. 결론은, 박사 자신에 대한 기억은 잃었지만, 몸에 밴 절차적 기억은 빠르게 돌아오고 있다는 거였죠.
그 무렵 재앙정보전달자 어스스피릿이 이상 데이터를 잡아내요. 전방에 거대한 사이클론이 몰려 코어를 형성하고 있다고요. 항로를 지키면 원석 폭탄 수백 개와 충돌하는 셈이고, 후퇴하기엔 이미 늦었어요.

함교에 나타난 박사에게, 아미야는 망설임 없이 로도스 아일랜드의 모든 지휘권을 넘겨요. 박사는 그 짧은 시간에 안전 경로를 계산해, 폭풍 사이로 배를 몰아넣었죠. 결과는 갑판 손상률 5% 미만, 부상자 0명이었어요.
절망에 가까워질수록, 희망을 품고 바라보는 풍경은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워요.
— 아미야
그 공식은, 사실 과거의 박사가 직접 만든 거였어요. 켈시는 말해요. 넌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오리지늄 연구자임을 잊지 않았다고. 이상 징후를 처음 짚어낸 젊은 화산 학자 에이야퍄들라도, 박사 같은 사람들이 자기한테 계속 나아갈 희망을 보여줬다고 했고요.
온 함선이 못 열던 붉은 금고, 열어보니 맥주였어요
그렇게 석 달이 흘렀어요. 박사는 로도스 아일랜드 구석구석을 떠돌며, 자기가 누구였는지 조각을 주워요. 하나같이 '낯설면서도 그리운' 감각뿐이었죠.
유품 보관실에선 페로 족 오퍼레이터 비글이 심하게 부서진 방패를 닦고 있었어요. 이제는 곁에 없는 옛 동료 에이스의 방패를요. 그 방엔 용문에서 스러져 간 리유니온 사람들의 유품도 함께 쌓여 있었고요.
적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어요. 박사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은 몰라도, 감염자의 고통만은 알아요. 비글은 오퍼레이터들이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고 했어요.
그 모든 것이, 과연 가치가 있었을까요?
— 비글
무거운 질문 사이로 좀 엉뚱한 사건도 있었어요. 창고 한구석의 붉은 기계 — 총괄 엔지니어 클로저가 커팅 머신 세 대를 부수고도 못 열던 물건인데, 박사가 툭 두드리자 스르륵 열렸거든요. 안에 있던 건, 맥주 자판기였어요. 그 무렵 살카즈 용병 W는 조용히 함선을 떠나 런디니움으로 향하고 있었고요.
전하를 배신한 게 아니라, 자기가 그린 전하를 배신한 거예요
떠오르는 기억 조각들은 자꾸 바벨로, 살카즈의 왕이자 지도자 테레시아가 있던 시절로 박사를 데려가요.
군사위원회에 밀린 테레시아가 카즈델에서 물러나기로 한 날, 살카즈 병사 하나가 박사의 캠프를 습격해요. 이종족 주제에 전하 곁에 있다면서요. 근데 박사는 그를 죽이려던 베테랑 용병 스카우트를 말리고, 오히려 이렇게 말하죠.
네가 믿지 않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네 전하니까.
— 박사
박사가 보기에 그 병사는 반역자라기보단, 테레시아를 더는 못 믿게 된 자신이 두려워 남 탓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결국 그는 자신을 '카즈델의 살카즈'라 부르며 전하의 처분을 받겠다고 했고, 얼마 뒤 왕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테레시아는 슬픈 얼굴로 그 소식을 들었어요. 갈 길이 멀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답을 원한다고요. 그 테레시아는, 지금 박사 곁에 없어요.
그래서, 넌 무엇을 위해 싸우는 거야?

노을이 지는 갑판에서, 켈시는 박사에게 물어요. 어떻게 살아야 진짜 사는 거냐고.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고 나아갈 이유를 잃었다면, 그건 살아있는 거냐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눈을 보고 말해 달라고 해요. 넌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고. 그 순간 체르노보그에서 깨어난 뒤의 모든 기억이 솟아올랐고, 박사는 무의식중에 어떤 답을 내뱉어요. 뭐라고 했는진, 우리한텐 들리지 않았지만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린 이렇게 걸어가야 하니까.
— 켈시
권한이 부족합니다 —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 하나
마지막 밤, 박사는 함선의 두뇌 PRTS를 찾아가요. 방금 전까지 클로저가 PRTS에게 그동안 봐 온 박사 이야기를 잔뜩 들려준 참이었죠. 기억을 잃기 전과 후, 분명 같은 사람인데 어딘가 달라진 그 박사를요.
박사는 PRTS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요. 근데 PRTS는 대답 대신 경고음만 울리죠.
현재까지 등록된 멤버 중, 그 질문에 답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PRTS
대신 PRTS는 셀프 체크 도중, 암호조차 걸리지 않은 오래된 영상 하나를 찾아내요. 날짜는 불명. 제목은 〈PRTS 첫 기능 테스트〉, 파일명은 〈함 내 영상기록 000000001α〉였어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렸습니다, 박사 박사님.' PRTS는 그렇게 말하고, 3초 뒤 권한을 잠근다며 숫자를 세기 시작해요. 3. 2. 1. 이야기는 거기서 멈춰요.
잠들 때마다 들리던 그 목소리는, 여전히 희망이 잔인하다고 속삭여요. 자기가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채로요. 그래도 박사는,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는 오늘도 앞으로 걸어가고 있어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가야 하는 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