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드래곤에게 여동생 파린을 빼앗긴 라이오스 일행은, 그녀를 되살리러 다시 미궁으로 향하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눈을 떠 보니, 하늘과 태양과 숲이 펼쳐진 낯선 땅. 마법은 잘 안 통하고, 정령도 반응하지 않아요.
여기는 미궁도, 그들의 세계도 아닌 '테라'였어요.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 네 사람의 미식 방랑기가 시작됩니다.
규칙은 던전에서와 같아요. 식량은 현지에서 자급자족. 즉, 눈앞의 낯선 마물을 잡아서 먹는다는 뜻이죠. 마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라이오스에게는 천국, 마르실에게는 지옥이고요.
마르실은 처음엔 '살아 있는 그림 속에 끌려온 게 아니냐'고 툴툴대요. 반쯤은 농담이었는데—나중에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죠.
1. 원석충은 삶으면 맛있다
첫 만남부터 소동이에요. 마르실이 돌인 줄 알고 밟은 게, 알고 보니 원석충 떼였거든요.
중무장한 오크 빅 밥은 사실 이 벌레들을 키우는 농장주였어요. 위험한 원석충을 다섯 번씩 씻고 향초와 고추로 잡내를 잡아, 매콤 볶음과 껍질 구이를 대접하죠.

마물이라며 손사래 치던 마르실도, 한 입 먹고는 결국 무너져요. 서두르다 대충 만들 뻔한 요리를, 센시가 정성껏 다시 잡아 준 덕분이죠. 사소한 과정도 대충 하지 않는 것—그게 센시가 말하는 요리의 매력이에요.
빅 밥은 길 잃은 일행에게 "밥의 미식 가이드"를 쥐여 주고, 이상한 놈들이 모인 곳—로도스 아일랜드를 알려줘요. 자기 요리를 맛있게 먹어 준 이들에게, 그도 큰 자신감을 얻었거든요.
고향이 그리워지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거지! 다른 건 잘 이해 못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나도 알겠어.
— 빅 밥
참고로 원석충은 보리 껍질 위에서 키우면 등에 보리 향 껍질이 자라, 그걸로 맥주를 담글 수 있대요. 과일을 먹이면 껍질이 달콤해져 팬케이크 재료가 되고요. 빅 밥의 미식 지식은 하나같이 알차죠.
2. 대제사장의 약탕 (사실은 목욕물)
정글에서 만난 악어 머리 아다크리스들은, 폭발과 함께 사라진 대제사장을 찾고 있었어요.
대화는 영 어긋나요. 아다크리스들은 센시와 칠책을 '두린'이라 부르고, 바다도 섬도 모른대요. 마르실이 아무리 설명해도 돌아오는 건 '이 사람 바보 아닌가' 하는 눈빛뿐이죠. 여기가 그만큼 먼 땅이라는 뜻이에요.
그 사이 마르실이 사고를 쳐요. 파린이 옛날에 준 산딸기와 똑 닮은 열매를 무심코 먹었다가, 동료들이 전부 레드 드래곤으로 보이는 환각에 빠져 폭주하거든요.
해독법을 아는 건 행방불명된 대제사장뿐. 센시는 큼직한 냄비에 스튜를 끓여 그를 유인해요. 소란스러운 잔치를 좋아한다기에, 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요.

알고 보니 통통한 새의 정체가 바로 대제사장. 스튜는 실은 그의 목욕물이었지만, 그 지독한 맛 덕분에 마르실은 정신을 차려요. 대제사장은 "방향은 맞다"는 알쏭달쏭한 말만 남기고 사라지죠.
3. 황금 당근과 부서진 라이트
림 빌리턴의 망해 가는 공장. 마지막 회식에 올릴 전통 요리 '황금 당근'을, 사장은 돈이 없어 차려 주지 못하고 있었어요.
마르실은 사장에게 받은 D32강 마술 도구 '라이트' 덕에 테라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돼요. 그런데 그 섬광 마법이 산성 원석충의 부식성 점액을, 새콤달콤한 금빛 액체로 바꿔 버려요.
그 과정에서 마르실은 이 세계의 마법 원리를 조금씩 깨쳐요. 던전의 지팡이만으론 자꾸 끊기던 마법이, D32강을 거치면 제대로 발현된다는 걸요.
문제는 문제는 라이트가 섬광 마법을 무리하게 쏘다 과부하로 고장 난 것 (센시가 보기엔 점액에 부식된 건 아니었죠). 센시는 "외관이 바뀌었을 뿐"이라며 미련 없이 그걸 냄비로 만들어 버리고, 마르실은 "안녕, 내 라이트……" 하고 오열하죠. 그래도 그 희생 덕에, 순금 원석충 없이 황금 당근이 완성돼요.

덕분에 사장은 접었던 꿈을 다시 꺼내 들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자기 물건이 누군가를 웃게 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으니까요.
4. 재앙을 보는 눈
눈의 사제를 찾아 헤매던 일행은, 사미의 심드렁한 견습 샤먼 오크컵을 만나요. 그는 나무껍질에 새겨진 '사미의 의지'를 읽어, 북쪽의 은둔자—사이클롭스에게 길을 물으라 일러 주죠.
사미의 검은 숲에서, 일행은 얼굴에 허공이 뚫린 기괴한 혼비스트를 만나요. 데몬에 오염된 짐승이었죠. 절벽이 무너지며 칠책이 홀로 떨어져요.
칠책을 구한 건 아르게스. 재앙만을 내다보는 사이클롭스였어요. 그는 칠책에게서 유독 많은 '죽음'을 보았다고 말하죠.
그리고 예언이 들어맞아요. 오염된 혼비스트 고기를 먹은 라이오스와 마르실, 센시가 얼굴을 잃고, 허무에 삼켜진 채 "북쪽 문으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중얼거려요.

서늘한 침묵이 흐르는 순간. 하지만 칠책은 겁먹지 않고, 화를 내며 세 사람을 쫓아가요. 이건 저놈들이 자초한 일이니까—그래도 동료니까요.
이 숲에서 일행은 케오베도 만나요. 로도스 아일랜드에 산다는 이 배고픈 사미 소녀는, 밥만 든든히 먹여 주면 어디든 안내해 주겠다며 냉큼 따라붙죠. 뜻밖에도 그녀가 집으로 가는 길잡이가 돼요.
5. 그림 속의 검은 슬라임
다음 무대는 어느 마을. 죽여도 되살아나는 검은 슬라임 '묵량'이 자꾸 마을을 습격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대처법을 배울 생각조차 없죠.
라이오스는 묵량들에게서 배운 아야오, 샤오차오, 터우시엔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과 며칠을 뒹굴며 그들의 언어까지 익혀요. 나머지 셋이 그를 찾아냈을 땐, 이미 네발로 기며 묵량들과 대화하는 야생아가 되어 있었죠.
그러다 라이오스가 깨달아요. 서식지도, 번식도, 새끼도 없다—여기 모든 게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하는 '가짜', 곧 그림 속이라는 걸요.
묵량은 그림 주인의 잡념이 흘러나온 것이었어요. 배불리 먹여 취하게 만든 묵량의 토사물로 센시는 잼과 과실주까지 만들고, 마르실은 기겁하죠.

이 마을의 안내자 '라이'는, 만물의 관계에서 진실을 읽어 내는 라이오스의 시선에 감탄해요. 그림 속 묵량에게도 저마다의 기원과 목적지가 있다면서요. 그러다 마을을 어지럽힌 걸 눈치챈 그림 주인이 검을 휘둘러, 네 사람을 그림 밖으로 내던지죠. 요란하지만, 이것도 나름의 배웅이었어요.
6. 굶주린 바다 마을
저 멀리 이베리아에선, 어비설 헌터 스카디가 별똥별처럼 떨어져 어느 주교를 처단하고 있었어요. 그 어두운 바닷가 마을 살비엔토에, 네 사람이 흘러들죠.
살비엔토는 오랜 굶주림에 감각마저 마비된 죽은 마을이었어요. 썩은 조개를 아무렇지 않게 삼키는 사람들을, 센시는 차마 두고 보지 못하죠.
바다 교회의 선교사는 '형제'가 되라며 일행을 위험한 동굴로 꾀어내요. 죽이려는 속셈이었지만, 정작 그 동굴은 거대한 크라켄과 공생 생물이 가득한 신선한 식재료 창고였죠.
테라에도 미믹이 있다는 걸 알아챈 칠책은, 상자 흉내를 낸 그 녀석에게 선교사를 잡아먹게 하고요. 라이오스는 그런 미믹조차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다"며 눈을 반짝이죠.
해산물 모둠을 한 상 차려 굶주린 주민들에게 나눠 주는 네 사람. 무감각했던 마을에, 오랜만에 사람들이 모여 웃어요.

7. 옥수수밭이 팝콘밭으로
황야의 개척지에선 오해가 겹쳐요. 폭주한 드론, 물자를 지키려는 개척자,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의 오퍼레이터 레이안까지 뒤엉켜 한바탕 난투가 벌어지죠.
마르실은 라이오스를 본뜬 사역마로 드론을 유인해요. 긴 혀를 내밀고 네발로 질주하는 '사역마 라이오스'의 모습에 개척자들마저 기겁하고요.
그런데 드론의 폭탄이 하필 개척자의 옥수수밭에 떨어져, 온 밭이 팝콘으로 튀어 올라요. 냄새를 맡고 나타난 케오베가 팝콘을 먹어치우고, 마르실은 그 팝콘 산에 파묻히죠.

그 팝콘 산에서 나타난 건, 사미에서 헤어졌던 케오베였어요. 마침 그녀를 데리러 온 오퍼레이터 레이안이 케오를 태우고 로도스 아일랜드로 떠나죠. 일행은 그제야 목적지가 코앞이라는 걸 알아채요.
낮에 그렇게 싸운 사람들이, 밤엔 같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마물 고기를 나눠 먹어요. 화해의 방식치고는 참 테라밥답죠.
8. 로도스 아일랜드 구내식당
드디어 벼랑 끝에서 그것을 봐요. 강철로 된 거대한 구조물, 하나의 도시이자 또 하나의 미궁—육지를 달리는 배, 로도스 아일랜드를요.
일행을 맞은 머드락은 빅 밥의 친구였어요. 그 딱딱한 벌레를 맛있게 조리하던 빅 밥이, 실은 요리를 행복하게 먹어 준 이들 덕에 자신감을 얻은 거였다고 전해 주죠. 감옥을 들락날락하고도 끝내 사미에서 잡화점을 차린, 그 질긴 인생 이야기와 함께요.
심술궂은 대제사장이 엘리베이터로 일행을 이곳저곳 날려 보내는 소동 끝에(원석충 스튜로 자기를 삶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래요), 늘 배고픈 케오베가 폭주해요. 천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그녀를, 아미야가 감정을 다독여 진정시키고 팝콘으로 달래죠.
그리고 로도스 아일랜드는 그야말로 라이오스에게 천국이에요. 온갖 종족의 오퍼레이터가 가득하니까요. 리베리가 알을 낳는지, 개와 고양이 수인 사이의 아이는 반반인지 진지하게 중얼거리다, 다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게 만들고요.
스카이파이어의 불로 밤을 굽다 혼쭐이 나고, 센시는 박사를 붙잡아 끼니 좀 제대로 챙기라 잔소리를 해요. 규칙적인 생활, 균형 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 그리고 여정 내내 만난 재료와 추억을 담아, 구내식당에 대반찬을 차리죠.
칠책은 헬라그와 실버애쉬, 호시구마 같은 거한들 틈에 껴 술잔을 기울이다 또 미성년으로 오해받고, 마르실은 비즈왁스와 머리 손질 이야기로 꽃을 피워요. 던전밥 일행과 로도스 식구들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뒤섞이죠.

음식은 기억과 연결되어 있네. 그래서 똑같은 요리를 먹으면, 그때의 느낌이 떠오르는 것이지.
— 센시
에필로그 — 잘 먹겠습니다
돌아갈 방법은 아직 못 찾았어요. 박사와 켈시가 시간을 들여 알아보기로 하고, 아미야는 네 사람을 로도스 아일랜드에 초대해요.
케오베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그야 머리가 천 개나 있으니까요), 빅 밥은 감옥까지 다녀오고도 사미에서 새 장사를 시작했대요. 각자의 자리에서, 다들 질기게 살아가고 있어요.
테라에서의 여정은 그렇게 한 그릇의 요리가 됐어요. 원석충 볶음엔 첫 스승 빅 밥이, 스튜엔 정글의 소동이, 황금 당근엔 다시 꿈을 꾼 공장이 담겼죠.
돌아보면, 이 낯선 세계에서 네 사람을 몇 번이나 구한 건 라이오스의 끝없는 마물 사랑이었어요. 남들이 기겁하는 그 괴짜스러움이, 위기의 순간마다 활로가 됐으니까요.
같은 향과 맛을 다시 느낄 때마다, 그 순간의 사람들과 웃음이 함께 떠오를 거예요. 마르실이 파린을 되살릴 그날처럼요.
파린을 구하러 가는 길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멋진 추억도 많이 생겼다고 얘기해 줘야지…… 틀림없이 걔도 기뻐할 거야!
— 마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