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국 상촉은 산과 산 사이에 도시를 흩어 세운 동네예요. 옆 동네 마실 가는 데도 케이블카나 잔도를 타야 하죠. 그런데 그 험한 지형 덕분에, 봉우리마다 전설이 하나씩 얹혀 있어요.

이야기는 어느 객잔의 부녀 대화 한 토막으로 열려요. "아빠, 칼 밑의 거치대는 왜 비어있어?" "어떤 사람을 위해 남겨둔 거란다." "그 사람은?" "아빠랑 사이가 틀어져 버렸지." 왜 틀어졌는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아요.
용문의 사설탐정 리는 10년 넘게 연락 없던 동창 양현의 부탁 하나 때문에 상촉행 배에 올라요. 심부름은 간단해요. 골동품 검은 술잔 하나 배달하기.
문제는, 이 술잔을 벌써 몇 명이나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거예요. 게다가 나루터에 내리자마자 로도스 아일랜드의 크루스, 우요우와 우연히 마주쳐 버려요. 우요우 말마따나 이 정도면 우연이 아니라 각본이죠.
1. 첫 손님인 줄 알고 반겼더니 용의자였던 사연
리는 자신을 마중 나온 신 사공과 함께 상촉의 명물 행유객잔에 도착해요. 사장 정 사장은 장사에 진심인 후덕한 노인처럼 보이지만, 손에 있는 굳은살이 예사롭지 않죠.
종업원 류 씨는 오늘도 매출 타령을 하다 사장님한테 등짝을 맞아요. 이 객잔, 겉보기엔 그냥 흔한 맛집인데 어쩐지 2층 손님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요.
그런데 우연히도 같은 객잔, 같은 날에 크루스와 우요우도 자리를 잡아요. 우요우는 아직 정식 입사 전인 예비 오퍼레이터, 부채 하나로 근접전을 다 해결하는 만능 재주꾼이죠.

때마침 들이닥친 두 소저가 대뜸 우요우의 멱살을 잡아요. "용문에서 골동품 상자 들고 온 도둑, 너지!" 사람을 완전히 잘못 짚었는데도 기세만은 진짜예요.
결국 식탁이며 의자며 다 부서지고 나서야 싸움이 멈춰요. 정 사장이 나서서 겨우 말리고, 그제야 다들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죠. 뜻밖에도 리와 크루스는 이미 아는 사이였고요.
두 소저는 분을 못 이겨 발을 구르지만, 정 사장의 눈치를 힐끔거리다 결국 부하들을 데리고 물러나요. "우요우, 널 기억했어." 첫 만남부터 제대로 찍힌 셈이죠.
2. 동창이 부탁한 심부름은 사실 두 개였다
리는 양지부에 도착해 10년 만에 양현을 만나요. 툭툭거리는 재회 인사, 그리고 서로의 주량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따지는 실없는 시비까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학창 시절 얘기로 넘어가요. 그때 양현은 '세상 사람 모두를 위해 불을 피우겠다'고 큰소리쳤고, 리도 나름 포부가 있었대요. 지금은 둘 다 그 시절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만요.
그런데 대화 도중 영 소저라는 여인이 불쑥 찾아와요. 양현은 순간 당황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리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줘요.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면서요.
그런데 양현이 술을 한잔 걸치고서야 진짜 용건을 꺼내요. "술잔의 주인을 찾아줘." 문제는 나이도 성별도 종족도 모른다는 거예요. 확실한 건 딱 하나, 상촉 어딘가 산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뿐이죠.
리는 투덜대면서도 결국 받아들여요. 예전의 나는 그저 한 마리의 린수에 불과했어. 물 밖으로 살짝 뛰어오른 것만으로 온 세상이 제 것인 줄 알았던 시절 얘기를, 리는 술기운을 빌려 살짝 흘려요.
그날 밤, 리의 방 앞에 발 달린 찻주전자가 나타나요. 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요. 상촉엔 별난 애완동물이 유행하나 보다, 하고요.

3. 부채 든 낯선 손님과 관리 나리의 텃세
한편 크루스와 우요우는 저녁 마실을 나갔다가 슬럼버풋을 부리는 수상한 여자와 마주쳐요. 그리고 그 여자를 쫓던 덩치 큰 관리 태합한테 다짜고짜 감염자 취급을 당하죠.

좌락은 담담하게 정체를 밝혀요. 조정 비밀기관 사세대의 지촉인. 그리고 니엔과 시가 '쉐이'라 불리는 존재이자, 지금 상촉에 숨어 있다는 사실까지도요.
게다가 이 모든 게 며칠 전 회제산에서 있었던 일과도 얽혀 있대요. 크루스는 얼떨결에 니엔의 뒷사정을 지키는 방패가 돼 버려요.
좌락은 나이는 어려도 사세대 역대 최연소 지촉인이에요. 정중한 말투 뒤로, 협상 카드는 이미 다 계산해 놓은 눈치고요. 크루스는 이 소년이 순진한 도련님이 아니란 걸 금방 알아차려요.
같은 시각, 양지부 안뜰에서는 리와 양현 몰래 영 소저라는 여인이 서재를 기웃거려요. "이 책은 원래 여기 있던 게 아닌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그녀는 상자 하나를 조용히 눈여겨봐 둡니다.
난 로도스 아일랜드를 믿어~ 그래서 그 사람도 믿는 것뿐이야~
— 크루스
4. 백 년 전 꿈에 초대받은 탐정
양현은 어릴 적 재앙이 닥친 산에서, 정자에 취해 쓰러진 여인을 본 적이 있다고 떠올려요. 그때 그녀가 들고 있던 술잔이, 지금 리가 배달해 온 그 검은 술잔과 똑 닮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죠.
그날 밤 양현과 한잔 걸친 리는, 정말로 이상한 꿈을 꿔요. 눈 내리는 정자에서 누군가와 바둑을 두는 꿈. 상대는 자신을 '링'이라 소개하고, 여긴 '백 년 전의 꿈속'이라고 말해요.

더 소름 끼치는 건, 상대가 리를 '그자 대신 앉은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꿈에서 본 게 나였을 뿐, 꿈을 꾼 건 내가 아니야. 리는 이 말을 오래도록 곱씹게 됩니다.
잠에서 깬 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태연해져요. 다만 그날부터, 리의 걸음이 산 쪽으로 조금씩 더 확신에 차기 시작하죠.
5. 도둑맞았는데 오히려 다행이라는 탐정, 그리고 10년 묵은 원한
밤사이 바운티 헌터 블랙나이트가 침입해 술잔을 훔쳐가요. 림 빌리턴 출신에 슬럼버풋 두 마리를 부리는 걸 보면, 이 동네 도둑은 확실히 아니에요.
그런데 리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낚시꾼이 몇 명이고 어떤 대물이 걸릴지 구경이나 하자며 태평하죠.
한편 두 소저는 아버지 몰래 표국 젊은이들을 모아 딴살림을 차리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큰 거래를 그르치게 만들어서라도, 표국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산에서 만난 지게꾼 상총의 말 한마디로 판이 뒤집혀요. 10년 전 폭우 속 습격에서 죽은 사람들 중엔, 상총의 아들도 있고 두 소저의 친아버지도 있었대요.
그날 동료들을 버리고 물건만 지킨 사람이 바로 정 사장이었다는 것도요. 두 소저는 처음으로, 자신이 물려받을 그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 빚 위에 서 있는지를 알게 돼요.
6. 산꼭대기로 다들 모여드는 기막힌 우연
결국 정 사장과 상총은 취강봉 정상, 망수평에서 칼을 맞대요. 10년 묵은 빚을 이제야 청산하려는 거죠. 그런데 하필 같은 곳으로 술잔을 쫓던 좌락과 태합, 그 뒤를 따르던 크루스와 우요우까지 죄다 몰려들어요.
칼과 부채와 곤봉이 뒤엉키는 사이, 정작 술잔은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져요. 다들 허탈해할 새도 없이, 뒤늦게 밝혀지는 사실이 하나 있어요.
이 소동 전부가 양현의 그림이었다는 거예요. 사세대가 힘으로 술잔을 빼앗아 가면 예부와 정면충돌, 상촉이 그 사이에서 으스러질 판이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자기 손에서 술잔을 놓아버린 거죠. 저택에 몰래 드나들던 손님 영 소저의 정체가 예부 좌시랑이었다는 것도 이쯤 밝혀져요. 양현이 그토록 말을 아꼈던 이유가 다 있었던 셈이에요.
사세대와 예부, 두 조정 기관의 알력 사이에서 상촉이라는 작은 도시 하나가 통째로 저울에 올라간 셈이죠. 양현은 그 저울이 기울지 않도록, 자기 손으로 자기 발등을 찍는 쪽을 택한 거고요.
내가 염국 조당에서 배운 첫 마디가 '천명은 사람에게 달렸다'인데.
— 양현
7. 언니, 동생, 그리고 산속에 숨은 진짜 흑막
혼란 속에 니엔과 시가 모습을 드러내요. 크루스와는 구면, 사세대에는 눈엣가시. 좌락과 니엔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을지 저울질하며 날 선 말을 주고받아요.
그사이 태합과 우요우도 정식으로 한판 붙어요. 서른 세 초식을 받아내는 우요우를 보고, 좌락은 무심코 "리엔 가문의 음청선"이라 알은체를 해요. 진심으로 부딪히고 나서야, 태합도 이 부채 든 젊은이를 다시 보게 되죠.
정 사장과 상총의 결투도 계속돼요. 낙석이 떨어지자 딸을 구하려던 정 사장 대신 두 소저가 다치고, 상총이 마지막 순간 도리어 둘 다를 구해줘요. 오래된 원수라도, 아이 하나 다치는 꼴은 못 보는 거죠.
어수선한 산 정상, 니엔과 시와 크루스 일행은 함께 산 정상에 있다는 '언니'를 찾아 나서요.

드디어 만난 링은 니엔과 시의 손위 언니예요. 태평하게 취해 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누구보다 빠르게 판을 읽죠.
그리고 셋은 함께 알게 돼요. 검은 술잔 안엔 오래전 실종된 또 다른 형제의 의식 조각이 갇혀 있다는 걸요. 그 형제는 바둑에 미쳐 스스로를 181개의 흑돌로 쪼갠 죄인이래요.
이 소동 전부가, 그 죄인이 심심풀이로 벌인 장난이었던 거죠.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 굳이 리를 판에 끌어들이면서까지요.
좌락은 사세대의 임무를 앞세워 자꾸 다그치지만, 니엔은 눙치듯 되받아쳐요. "우리 이해관계는 이미 일치하는 거 아니야?" 협상 아닌 협상이 팽팽하게 이어져요.
8. 거대한 그림자와, 그걸 지워버린 대답
세 자매의 그림자가 뭉쳐 거대한 쉐이의 형상을 만들어내요. 눈뜨면 자신들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니엔은 두렵고, 시는 떨고 있어요.
그래도 니엔은 물러서지 않아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이유는 묻지 마세요, 그냥 그렇대요. 시도 말은 안 해도 어쩐지 조금은 기대하고 있고요.

그런데 링은 태연히 술 한 잔을 따라 그림자 앞에 내밀어요. 저건 그저 마음속에 비친 환영일 뿐, 실체 없는 형체에 놀아날 필요 없다고요.
세상은 이미 만 년이나 취했는데, 나는 꿈 한 번도 꿀 수 없나? ……상관없어.
— 링
거대한 그림자는 바람 한 줄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요. 답은 늘 그렇듯 간단했던 거죠. 나는 누구인가, 그 물음에 먼저 답하는 쪽이 이기는 대국이었으니까요.
에필로그 — 그 후, 봄의 상촉

태부는 등장 한 번으로 뒤엉킨 실타래를 다 풀어버려요. 사세대의 월권은 눈감아주는 대신, 양현은 경성으로 승진 발령이 나요. 영 소저는 다음 임지인 옥문으로 먼저 출발하고요.
염국의 하늘 아래에서 내가 두려운 건,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고 나라가 부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 태부
니엔에게는 북방을 지킬 거대한 방벽 사업이 맡겨져요. 링은 100년 전 실종된 형제의 행방을 계속 좇기로 하고요.
링이 궁금해하던 것 하나. 몇백 년 전, 태부는 대체 그 바둑에 미친 죄인을 어떻게 이겼을까요?
답은 의외로 싱거워요. 바둑판이 아니라 염국 땅 전체를 판으로, 백성 전부를 돌로 삼아 대신 겨뤘을 뿐이래요.
뒤늦게 도착한 오퍼레이터 레이즈가 사세대와 로도스 아일랜드 사이를 중재하며 사태는 겨우 마무리돼요. 좌락은 태합에게 잔소리를 듣고, 크루스와 우요우는 사무소에서 온 또 다른 골칫거리 소식에 한숨을 쉬죠.
정 사장과 상총은 결국 서로를 베지 않아요. 화해는 아니에요. 그저 각자의 빚을 각자의 방식으로 짊어지기로 할 뿐이죠.
그리고 두 소저는 아버지 곁을 떠나 새로운 곳, 옥문으로 향하기로 결심해요. 온실 속에서만 살아온 아가씨는 이제 없어요.
리는 여전히 용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옛 친구 와이틴푸이의 행방부터 좇기로 해요.
크루스가 문득 물어요, 양현이 용문의 웨이 옌우와 닮았다더니 대체 어디가 닮았냐고요. 리의 대답은 짧아요.
둘 다, 마음에 품은 사람 앞에선 꼼짝도 못 하잖아요.
— 리
참, 블랙나이트도 실은 영 소저가 몰래 보낸 사람이었다는 게 뒤늦게 드러나요. "그분이 저도 모르는 사이 복잡한 일에 말려들지 않길 바랐을 뿐"이라며, 영 소저는 굳이 캐묻지 말라는 듯 웃어넘기죠.
이야기 첫머리, 그 객잔의 빈 칼 거치대를 기억하시나요? 사이가 틀어진 어떤 사람을 위해 남겨둔 자리였죠.
상총은 여전히 상촉을 떠나지만, 정 사장은 이렇게 말해요. "난 상촉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 거치대, 어쩌면 언젠가는 채워질지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