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 라바에게 떨어진 부탁은 단순했어요. 동료 니엔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여동생 '시'를 좀 찾아와 달라는 거였거든요.
염국 오지의 산속, 초가집 문 하나만 열면 끝날 줄 알았던 이 심부름은 딱 그 문을 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문 너머엔 해와 달이 한 하늘에 떠 있는 마을과, 자기가 그림 속 존재란 걸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1. 은혜 갚겠다던 전달자, 알고 보니 이름부터 지어낸 거였습니다
글룸핀서 무리에게 쫓기던 낯선 남자 하나를 구해준 게 시작이었어요. 스스로를 '전달자'라 소개한 이 사람은 나중에 '우요우'라는 이름까지 그 자리에서 지어냈죠.
라바는 바로 알아챘어요. "방금 생각해낸 거지?!" 그래도 크루스가 재밌어하니, 일단 데리고 가기로 합니다.
한 달 전,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에서 니엔은 이렇게 말했었죠. "수고스럽겠지만 내 여동생을 데려와 주길 바라." 설명은 그게 전부였고요.
니엔은 이미 클로저의 승낙도, 크루스의 동행도 다 받아놓은 상태였어요. 라바에게는 그저 통보였을 뿐.
떠나기 전 니엔은 부적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어요. "어쨌든 내 동생이잖아……" 그 말에 담긴 불안을 라바는 그때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니엔은 헤어지기 전 짓궂은 말까지 흘렸어요. "《에인션트 포지》에서 사용한 그 무대 의상, 너 사실 좋아했지?" 라바는 강하게 부인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죠.
2. 문을 여니 해와 달이 사이좋게 떠 있었습니다
니엔이 준 주소를 따라 회제산에 오른 셋은 산속 초가집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셋 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정원에서 '자산거사'라는 이야기꾼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었죠.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이야기꾼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고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셋이 정원을 나서던 참, 하늘을 올려다본 라바가 굳어버려요. 대낮인데 다리 저편엔 등불이 걸려 있고, 저 하늘엔 해와 달이 나란히 떠 있었거든요.

설상가상, 종이 울리자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기 시작해요. "서쪽 산에서 괴물이 온다! 햇빛이 있는 곳으로 피해!"
정체 모를 검은 것들이 떼로 몰려오고, 라바와 크루스는 일단 싸우기로 합니다. 우요우는 얼떨결에 그 뒤를 쫓아가고요.
베어봐도, 쏴봐도 그것들은 피 한 방울 없이 검은 얼룩으로 변해 사라질 뿐이었어요. "감염된 흔적은 안 보이는데……" 크루스도 감을 잡지 못합니다.
3. 여기는 파산 마을, 연호부터가 처음 듣는 것이었습니다
괴물들을 물리치고 나서야 자산거사에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이곳은 '파산 마을', 지금은 징줘 7년 섣달그믐이라고 하네요.
우요우가 작은 소리로 되물었죠. "징줘요? 그런 연호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다들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더 이상한 건 지리였어요. 마을은 동쪽부터 서쪽까지가 통째로 낮부터 밤까지라서, 해와 달은 늘 그 자리에 걸려 있을 뿐 뜨고 지는 법이 없다더군요.
그리고 매년 섣달그믐마다 홍동산에서 괴물이 내려와 마을을 삼십오일 동안 들쑤신다고 해요. 자산거사는 그저 '태양이 있는 곳에 숨는 것' 말고는 답을 찾지 못했다고 하고요.
라바는 거래를 제안합니다. 마을의 이 밤을 무사히 넘겨줄 테니, 대신 여기서 나갈 방법을 알려달라고요. 자산거사는 어쩐지 순순히 승낙했어요.
4. 종 치는 스님과 뭔가를 숨기는 전당포 주인
종탑을 지키는 사가라는 떠돌이 승려가 마을에 나타났어요. 검을 휘두르면 괴물이 먹물 자국만 남기고 사라진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챈 것도 이 사람이었죠.
사가는 이 괴물들에게 '묵량'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먹물처럼 사라지는 이매망량이라는 뜻으로요. 본인은 겸손하다는데, 다들 이미 감탄하고 있습니다.
묵량 하나를 상대하며 사가가 중얼거려요. "그림의 길이는 때때로 바뀌고, 곳곳의 경치는 괴상해진다오." 라바가 되묻기도 전에 사가는 태연히 다음 괴물을 벱니다.
그 소란 통에 전당포 주인 라이도 처음 얼굴을 비쳐요. 그런데 묵량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라며 타이르는 모습이 어쩐지 심상치 않죠.
라바가 묻자 라이는 태연히 잡아뗍니다. "아뇨, 본 적 없어요." 사가만 이 어색한 공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둘의 재회를 반가워할 뿐이었어요.
그 사이, 마을 꼬마 란이 크루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물어요. "언니는 마을을 도운 영웅이래. 그럼 언닌 분명 엄청 강하겠지?!" 크루스는 심드렁하게 답합니다. "영웅은 그냥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5. 자고 일어나면 마을이 통째로 새로 태어납니다
다음 날 아침, 죽은 줄 알았던 란이 엄마가 멀쩡히 걸어다니고 있었어요. 부서졌던 처마도, 짓밟혔던 골목도 전부 원래대로.
사가가 담담히 설명해요. 그림 밖 사람인 우리 넷이 눈을 감으면, 이 세상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 슬그머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요. 그러니까, 여긴 정말로 그림 속이었던 거죠.
전당포 주인 라이는 라바에게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집니다. "물속의 달을 건지려 애를 쓰실 셈인가요?" 풍랑이 가라앉으면 달은 어차피 다시 둥글어지는데 말이에요.
물속의 달은 비록 물결에 어떤 모양으로든 부서지게 되지만, 풍랑이 일지 않고 고요해지면 다시 둥근 달로 돌아옵니다.
— 라이
그런데 다음 습격에선 룰이 깨져요. 대낮에도 묵량이 몰려들고, 이번엔 정말로 사람이 물립니다. 남편을 잃은 마을 사람이 절규하죠.
"왜! 왜 내 남편이 죽은 거야!"
가짜라고 믿고 지켜만 보기엔, 우는 소리가 너무 진짜 같았어요. 라바와 크루스는 결국 다시 검과 석궁을 듭니다.
6. 부채 한 자루만 남기고, 원수는 갚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그동안 능청스럽던 우요우가 처음으로 진짜 이야기를 꺼내요. 열세 살에 리엔 가문의 무술 도장에 팔리듯 들어가, 십여 년을 사부 밑에서 자랐다고요.
그런데 작년, 시합에서 사람을 죽이고 말았어요. 알고 보니 그건 쇠퇴한 도장 간판을 부수려는 자들의 함정이었죠. 규칙이랍시고, 사부는 사람들 앞에서 피를 흘리며 세상을 떠났고요.
우요우에게 남은 건 사부의 부채, '음청선' 하나뿐이었어요. 그 뒤로 신분을 감추고 점쟁이인 척, 전달자인 척하며 도망 다니는 삶이었죠.
언젠가…… 전 구오성으로 돌아갈 겁니다. 돌아가서 따질 겁니다.
— 우요우
우요우가 실력을 숨겨온 이유도, 크루스가 진작 눈치채고도 캐묻지 않은 이유도 이거였네요.
라바는 별로 놀라지 않아요. "넌 다른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그 말 한마디에 우요우는 또 눈물바람입니다.
7. 대나무 폭죽 한 방과 라이의 알쏭달쏭한 힌트
라이가 슬쩍 힌트를 흘려요. '폭죽'이란 물건이 이 마을엔 없지만, 만들면 묵량이 무서워할 거라고요. 재료는 자산거사의 정원에 있던 대나무.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자랄 거예요." 라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름드리 대나무를 통째로 베어 내줍니다.
라바가 불 조절을 맡고, 대나무가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자 묵량들은 정말로 겁을 먹고 달아나요. 셋은 그렇게 매일 밤 마을 입구에 모닥불을 피우는 일상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산거사가 흘리듯 묻습니다. "……니엔?" 아무도 그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8. 십 년 동안 낮잠 잔 스님, 그리고 그림 속의 그림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던 사가가 이레 만에 눈을 떠요. 자산거사가 물어요. "오랜 꿈에서 결국 깨어났구나…… 얼마나 지났지?"
사가의 대답은 태연했어요. "매화가 열 번 피었다가 열 번 지는 걸 보았소." 셈해보니 무려 십 년이었죠.
사가는 몇 해 전 천악산이라는 또 다른 그림 속에 발을 들였다가, 그곳에서 조용히 십 년을 살았던 거예요. 지금 막 빠져나온 건 그 그림 하나였을 뿐이고요.
천악산 그림의 주인, 시가 마침내 사가 앞에 나타나요. 사가는 십 년간 품어온 질문을 꺼냅니다. "그림 속의 사람은, 참이오, 거짓이오?"
시가 되묻죠. "그림 속의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 왜 진위를 묻는 거지?" 그러고는 담담히 답을 내놓아요.
너와 나, 모두가 화중인, 그림 속 사람이야.
— 시
시는 사가에게 옛 기억 하나를 보여줘요. 젊은 날의 주지 스님이 굶어 죽은 사람들 사이를 사흘 밤낮 걸으며 기도하던 모습을요.

사가의 스승이 그림에 몰래 '기'라는 한 글자를 더 적어 넣은 이유도 그제야 풀려요. '졸산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었죠. 사가는 홀가분한 얼굴로 다시 길을 떠납니다.
9. 언니가 마침내, 그림에 갇힌 여동생을 찾아냈습니다
정작 우요우와 크루스는 각자의 꿈속에 갇혀 있었어요. 우요우는 사부의 원수를 갚지 못한 채 또 한 번 죽고, 크루스는 옛 동료 비글을 다시 만났다가 허무하게 흩어지는 꿈을요.
둘을 깨운 건 니엔이었어요. "만약 내가 널 찾지 않았다면, 넌 구오성을 떠난 시점부터 다시 한 번 살아야 했을 거야." 니엔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니엔은 라바에게 옛이야기를 하나 들려줘요. 아주 먼 옛날, 염국의 젊은 황제 진룡이 오만한 천지신명들을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를요.

"그 존재들은 지금도 테라 곳곳에 형태를 바꿔 남아 있어." 니엔은 웃으며 말하지만, 그 말 속엔 뭔가 서두르는 기색이 있었어요.
이윽고 시가 나타나요. 니엔의 '착한 동생'이라는 말에 발끈하면서도, 결국 언니의 말에 못 이겨 대화에 응합니다.
"네가 나보다 헷갈려 하면 안 되지. 이 긴 역사를 생각해 봐, 그들의 그림자가 몇 번이나 나타났을까?" 니엔이 말할수록 시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가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준비해야 해." 니엔의 말에 시는 결국 백기를 듭니다. "내기에서 진 걸 인정할게."
때마침 눈을 뜬 사가가 밥풀 묻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요. "선생님의 언니시오? 뵙게 되어 영광이오!" 방금까지 팽팽했던 자매의 대치가 순식간에 김이 빠집니다.
임무가 끝나자 우요우가 눈을 반짝이며 라바를 붙잡아요. "혹시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사람을 구하진 않습니까? 저는 뭐든 할 수 있다니까요!" 라바는 얼떨결에 승낙 비슷한 대답을 하고 맙니다.
에필로그. 파산 마을은, 그림에도 기억에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늙고 병든 라이가 마지막으로 시를 다시 만납니다. "당신은 내 목숨을 구해줬고, 살아남을 기회를 주었어…… 이 마지막 순간에도 이렇게 만나러 와주고."
라이가 부탁해요. 기억나는 거라곤 마을 이름과 옆집 전당포, 그리고 산 하나뿐이지만, 그 파산 마을을 대신 그려달라고요.
내 일생은 과연…… 행복했을까?
— 라이
라이의 마지막 질문에, 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요.
장면은 바뀌어 로도스 아일랜드. 니엔에게 이끌려 온 시는 여전히 까칠하지만, 밤새 영화를 보고, 니엔의 마작판에 슬쩍 낄 궁리도 합니다.
그런데 시가 문득 묻습니다. "박사와 켈시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려주지 않았잖아. 그 둘이 네가 여기 있는 이유랑 관련 있는 거야?" 니엔은 웃으며 대답을 미룹니다. "다 들으면…… 내가 왜 여기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거야."
니엔의 여동생을 찾으러 간 심부름은 그렇게 그림 한 폭을 통째로 건너오는 여정이 되었어요. 자산거사도, 사가의 십 년도, 라이의 한평생도 모두 시가 그린 그림 속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서 울고 웃은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거짓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