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작물은 씨앗이 자란 건데, '우리'는 무엇이 자란 거야? 우리는 어디에서 왔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야?
— 아이의 목소리
우리는 땅에서 자란 거야, 죽고 나면 다시 땅으로 돌아가. 사람이든 식물이든, 모든 건 순환의 일부야.
— 상냥한 여자
대황성은 염국 북쪽 끝, 오리지늄 오염이 유독 적은 귀한 땅이에요. 사람들은 이곳을 염국 제일의 곡창지대로 키웠고, 매년 여름 수확철이면 이 땅을 처음 개간했다는 '신농'을 기리는 축제를 열어요.
전설에 따르면 신농은 천 년 전 새 씨앗을 찾아 북쪽으로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고 해요. 그래도 수확철마다 하늘에서 내려와 올해 농사를 살펴본다고들 하죠. 다들 그냥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이번에 대황성으로 오게 된 사세대 지촉인 좌락은, 신농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기록을 우연히 읽어버려요. 그리고 그 기록 속 인물의 눈빛이, 자기 옆에서 매일 논에 물을 대는 상냥한 천사와 자꾸 겹쳐 보인다는 것도요.
1. 좌천 도련님, 도착하자마자 밥 얻어먹고 별명 뺏기다

아버지 좌선료에게 크게 혼난 좌락은, 옥문에서 저지른 실수의 벌로 대황성 파견을 받아요. 반성문 대신 받은 임무는 놀랍게도 '봄 파종'이었죠.
도착하자마자 논에 멍하니 서 있기만 하는 좌락을, 가축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명랑한 소녀 소만은 밥도 안 먹는 허수아비 취급해요. 도시락을 안겨주면서요.
논밭을 돌보는 상냥한 천사 슈는 그를 화생에게 소개하고, 좌락의 별명은 순식간에 '촛대 군'으로 굳어져요. 지촉인(持燭人)이 촛불 든 사람이라는 뜻이란 걸 안 소만의 작명이었죠. 곁을 지키는 시종 운청평은 몸이 약해 무예 대신 기록을 배웠는데, 다들 그를 '붓 군'이라고 불러요.
어느 밤, 넷은 반딧불이를 쫓다가 별똥별을 봐요. 소만은 별이 떨어진 곳엔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고, 다 같이 그 자리를 찾으러 가자고 졸라요.

설령 찾지 못하더라도 계속 찾을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될 때까지.
— 소만
2. 신농은 신화 속 인물? 아뇨, 실은 그냥 옆집 천사였습니다
신농제 날, 좌락은 연극 《쟁천시》를 보며 논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을 지닌 농업천사 화생에게 신농의 전설을 들어요. 재앙으로 폐허가 된 땅을 되찾고, 새 씨앗을 찾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 이야기였죠.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던 좌락은 소름 돋는 사실을 발견해요. 24절기를 정하고 대기근 때 나타나 천 년을 눌러앉았다는 그 '신농'의 자리에, 자꾸 슈의 얼굴이 겹쳐 보이거든요.

이 셋이 밤낮으로 짓고 있는 건 대황성을 통째로 지켜 줄 이동 요새, '오성 십이루'예요. 재앙과 전쟁을 동시에 대비해야 한다는 조정의 재촉 탓에, 공사 기한은 늘 빠듯하죠.
한편 슈는 밤마다 몰래 강가로 나가요.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벙어리 아저씨'에게 밥을 가져다주면서, 소만에게는 그냥 아픈 사람이라고만 말해 주고요.
3. 축제 한복판에 진짜 날벼락이 떨어지다

신농제가 한창일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댐이 무너져요. 오리지늄 파편이 섞인 흙탕물이 논밭으로 밀려들죠.
화생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이동 섹터를 직접 움직여 물길을 돌리자고 제안해요. 안 된다던 토목천사들을 밀어붙이면서요.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건가요! 빨리 조작해 주세요!
— 화생
결국 물은 빠지고 사람들은 무사해요. 하지만 그 밤 강가에서 홀로 쓰러진 사람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몰랐죠. 슈였어요.
4. 수상한 나그네가 소녀에게 소원을 팔다
홍수가 지나간 자리, 논에서 낮잠 자던 노숙자 하나가 소만 일행 앞에 나타나요. 자기가 상인이라며, 뭐든 팔고 뭐든 산다고 하죠.
소만이 장난삼아 던진 소원 — 대황성이 해마다 풍년이었으면 좋겠다는 말 — 에 그는 소만의 노래 한 곡을 값으로 받아 가요. 그의 이름은 지. 슈의 남동생이었습니다.

화생은 그를 수상하게만 여기지만, 좌락은 한눈에 알아봐요. 사세대가 오랫동안 감시해 온 요주의 대리인이라는 걸요.
5. 아무도 안 죽었는데 붉게 물든 벼 한 포기
홍수 뒤 폐허가 된 논 한가운데, 소만은 핏빛처럼 새빨간 벼 한 포기를 발견해요. 주변 벼는 다 쓰러졌는데 그것만 꼿꼿하고, 근처를 도는 버든비스트마저 새빨갛죠.

천사부 학생 하나가 몰래 이 벼를 모아 달라 부탁하는데, 정작 무엇에 쓰는지는 함구해요. 그 무렵 화생은 환각 속에서 평생 농사를 지어도 씨앗 한 톨 거두지 못하는 늙은 농부와, 강 건너 나무에 걸린 셀 수 없이 많은 이름표를 봐요.
슈는 대신 옛이야기를 들려줘요. 함께 대황성을 개척했던 동료가 있었고, 그 사람은 재앙 속에서 자기 대신 북쪽으로 떠났다고요.
우린 결국 이 모든 걸 지키지 못했지.
— 슈
6. 신, 사실 지쳐 있었습니다
지는 슈를 계속 찾아와요. 이제 이 무거운 땅을 떠나자고, 니엔이 만드는 '심장'에 목숨을 맡기는 건 너무 위험한 거래라고요.
슈는 매번 거절해요. 하지만 지가 떠난 뒤 홀로 남으면, 슈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져요. 천 년 동안 이 땅의 재앙을 남들보다 먼저 몸으로 느껴 온 사람이었으니까요.
좌락은 지가 흘린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아요. 최근 석 달 사이, 천기각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가 죽었는지 아느냐는 말이었죠. 형제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둘째, '바둑꾼'이라 불리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자꾸 흘러나와요.
7. 야심 많은 시랑, 재앙과 손을 잡다
오성 십이루 공사를 맡은 젊은 시랑 만 시랑은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예부에서 파견된 라이벌 영사추에게는 늘 날을 세우면서도, 공사 기한만큼은 목숨 걸고 지키려 했죠.
그런 그의 앞에 지가 나타나 물자를 대주는 대가로 거래를 제안해요. 만 시랑은 오해라며 발뺌하는 대신 흔쾌히 응하고요.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전 만 시랑이 일개 서생에서 2품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지
결국 코어가 폭주하던 날, 통제 불능이 된 장치를 홀로 막겠다고 나선 것도 만 시랑이었어요. 평생 가장 싫어했던 말이 '통제를 벗어나다'였다는, 그 고집 하나 때문에요.
서로 으르렁대던 라이벌이었지만, 영사추는 그 죽음까지 이용당하게 둘 수는 없었어요.
8. 붉은 노을이 뜨자 세상이 뒤집히다

코어 에너지가 갑자기 폭주하고, 땅속에서 정체 모를 괴물들이 끝없이 솟아나요. 지가 니엔과 시를 위협해 억지로 '심장'을 가동시킨 결과였죠.
괴물의 정체는 재앙이 낳은 두려움 그 자체 — 사람이 무서워할수록 강해지는 존재예요. 화생과 좌락은 도망치는 대신, 사람들을 모으고 함께 맞서 싸우자고 외쳐요.
싸움 직전, 소만은 화생에게 몰래 속마음을 털어놔요. 자기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면서, 가족이 없다고 아무도 신경 안 쓴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요. 너무 무서운 나머지, 평소엔 못 하던 말이 튀어나온 거였죠.
두려워하지 말라고는 했는데…… 그런 게 무리인 건 나도 알아.
— 화생
9. 강가의 침묵,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괴물 떼 사이, 오랫동안 강가에 홀로 살던 말 없는 나무꾼이 도끼 하나로 버텨요. 소만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찾아가 피리를 불어요.
나무꾼은 마지막 힘을 다해 소만을 지켜내지만, 하지만 한계에 다다른 그를 시조가 멈춰 세워 구해내고, 딸을 위해서라도 살아 돌아가라 이르죠.. 오래전 딸을 두고 이 강가에 남기로 한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끝내 아무에게도 말해지지 않았어요.
같은 시각 코어 안에서는 만 시랑이 홀로 장치를 막고 있었어요. 다시 나오지 못했지만, 그가 품었던 '만리도시'의 꿈만은 슈가 대신 받아 갔습니다.
10. 번지지도 못한 연, 그래도 살아남다
여전히 괴물 사이에 갇힌 시험 농지 사람들을 구하러, 화생과 좌락은 무너지기 시작한 섹터 틈을 뛰어다녀요. 좌락은 사람을 한 명씩 안고 갈라진 틈을 뛰어넘고요.
마지막 순간 화생이 크게 다쳐요. 그런데도 자기 연구 자료가 든 천사의를 연으로 바꿔, 좌락 혼자 하늘 위로 날려 보내죠.
네게 계속 안 좋은 소리 했지만, 넌 사실 좋은 녀석이야.
— 화생
혼자 남겨진 화생 앞으로 괴물이 몰려들어요. 다행히 그를 구한 건 다행히 그를 구한 건 소만이 기르던 스톡비스트, '보들이'였습니다.였습니다.
11. 신,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사람이 되다

슈는 괴물의 근원인 '쉐이'의 의식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요. 천 년간 이 땅의 공포를 대신 짊어져 온 그 어린 그림자에게, 세상은 무서운 곳이 아니라고 조곤조곤 말해 주기 위해서였죠.
넌 두려워하고 있어. 진짜로 살아보지 않았으니까.
— 슈
슈의 말이 끝나자 하늘은 맑아지고, 코어의 폭주도 멎어요. 좌락과 화생은 무너지는 이동 섹터 사이에서 서로를 밀어 올려 겨우 살아 돌아오고요.
화생은 그토록 찾던 오리지늄 저항성 벼, '완칭'이 살아남은 걸 확인해요. 그런데 정작 그 벼를 함께 길러온 슈는, 재앙이 끝난 뒤로 대황성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에필로그.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다
재앙이 지나간 자리, 슈는 기억을 잃은 채 낯선 마을에서 눈을 떠요. 벼농사에 대해 뭐든 아는 이 '선생님'을 화생은 이상하게 여기지만, 정작 그녀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몰라요.
한편 시는 붓을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져요. 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마치 꿈 같았다고, 너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는 말만 남긴 채로요.

지는 천 년 걸려 완성한 천을 챙겨 대황성을 떠나요. 이 천에는 대황성뿐 아니라 염국 곳곳의 역사와 사람들의 마음이 실로 짜여 있었죠. 그가 만나러 가는 건, 오래도록 숨어 바둑만 두던 둘째 형이었어요.

니엔과 시가 힘을 합쳐 지를 몰아붙이지만, 그는 결국 무사히 빠져나가요. 그리고 그 순간,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둘째 형 '바둑꾼' 왕이 처음으로 슈 앞에 모습을 드러내요.
따져보면 이 일은 천 년 전부터 시작됐다.
— 왕
왕은 자신이 노리는 건 이 세상 전부를 위한 '큰 이익'이라 말해요. 슈는 말리는 대신 씨앗 한 줌을 건네죠. 정말 옳은 길을 걷고 있다면, 이 씨앗도 언젠가 싹을 틔울 거라면서요.
떠나기 전, 시는 형제자매 한 명 한 명에게 어울릴 법한 풍경을 그려 줘요. 국경을 지키는 큰형, 자유로운 시인 언니, 상촉을 떠도는 니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까지요.
그리고 슈에게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남겨 줍니다.
이런 게 '인간'의 삶인가요? 뭔가…… 즐겁군요.
— 지
좌락도 조금 달라져 있었어요. 아버지에게서 복직 통지를 받고, 다음 임무는 대리인들과 접촉이 잦은 '로도스 아일랜드'를 살피는 일이라는 말을 들어요. 예전처럼 두려워하며 서두르는 대신, 이번엔 담담하게 짐을 챙기죠.
설령 '적'이라 해도 가늠할 수 없는 건 아니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 좌락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땅에서 자라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던 그 옛말처럼, 슈는 이제 이름도 얼굴도 없이 이 땅의 일부로 돌아갔어요.
대황성 사람들은 지금도 여름마다 신농을 기리는 축제를 열어요. 다만 이번 수확부터는, 오리지늄에 강한 벼도 함께 제단에 올라가요. 신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이 심고 사람이 거둔 열매가 대신 놓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