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세계관엔 흔한 조합이 있어요. 돈 없는 섹터, 그리고 그 돈을 받으러 오는 은행. 컬럼비아 동부 산림지대에 좌초된 채굴 섹터 데이비스 타운도 다르지 않았어요.
동력로가 터진 지 1년, 정부는 손 놓고 눈만 펑펑 내리는 이 마을에 블랙스틸 용병단이 파견돼요. 표면적인 임무는 동력로 수리였죠.
그런데 베테랑 용병 제시카의 품속엔 상사가 몰래 쥐여준 수상한 탄환 한 발이 있었어요. '데이비스 타운의 우드로 비앙키에게 전해줘'라는, 설명 하나 없는 심부름과 함께요.
그리고 몇 달 뒤, 이 마을을 살리러 온 용병들은 은행을 털고 있었어요. 순서가 좀 이상하죠?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볼게요.
1. 눈밭에서 주운 사냥꾼, 알고 보니 이름이 있었다
동력로 임무에 앞서 눈보라 속에서 낙오된 제시카. 총성과 함께 나타난 건 무뚝뚝한 늙은 사냥꾼이었어요. 방금 쏴 죽인 사슴을 손질하다 말고, 제시카에게 데이비스 타운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툭 던지죠.
가는 길에 새끼 사슴 한 마리가 덫에 걸려 있었어요. 사냥꾼은 목을 비틀어 편하게 보내주자 하고, 제시카는 굳이 품에 안고 자연사할 때까지 지켜봐요. "용병이 호스피스 케어를 하는 건 처음 보는군" — 사냥꾼의 감상입니다.

저녁, 헬레나의 레스토랑에서 사냥꾼이 '우디'로 불리는 걸 보고 제시카가 물어요. "혹시 우드로 비앙키를 아세요?" 헬레나도 리온도 눈을 끔뻑여요. "누구……?" 매일 보던 그 사람의 정식 이름을,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2. 은행 하나가 마을 전체를 저당 잡았습니다
데이비스 타운 은행은 위임장 요청에 "직인이 어제 갑자기 사라졌다"고 답하는 곳이에요. 정부 사무실은 은행 차고에 얹혀살고, 주민들은 물을 아끼려고 창밖 눈을 퍼서 녹여 마셔요.
리온이 위험한 동력로 보수를 자원해요. 일주일 안에 끝내면 20만 수표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요.
사연을 캐묻자 리온이 툭 터놓습니다. "섹터 전원이 빚졌다시피 해, 눈밭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진 사람도 대개는 빚 때문이야."
실은 방금 제시카도 그 실종자를 목격했어요.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발자국만 남기고 사라진 남자를요. 유쾌한 동네인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뒤가 서늘합니다.
3. 동력로도, 사람들도 이미 만신창이였다
동력로 내부는 로라조차 "내가 환각을 본 게 틀림없어"라 할 정도로 참혹했어요. 사고 훨씬 전부터 카라반이 지게차와 통조림을 슬쩍슬쩍 맞바꿔 간 '합법적 약탈'의 흔적까지 나오죠.
로라는 원래 일하며 쉴 새 없이 혼잣말을 해요. 그런데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 동료가 설명해요. "로라 씨가 말을 안 한다, 그럼 그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피 경보가 울려요.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전원 귀환. "비켜, 제시카…… 나 배고파 죽을 것 같으니까"라는 로라의 첫마디에 다들 그제야 마음을 놓아요. 그사이 은행 뒷골목에선 건달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리온의 아들 베니를 제시카가 구해내고요.
4. 다정한 마을이라 더 무서운 계획
은행은 리스캄에게 '치안유지용 명단'을 건네요. 요컨대 빚진 사람들을 강도 예비군 취급해 처리해 달라는 거죠. 리스캄은 명단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재조사하겠다며 버팁니다.
제시카가 정찰 중 만난 블랙스틸 동료가 툭 흘려요. "이런 파산 직전 섹터는 부채, 세무 조사, 보안 취약점…… 구실이야 많지." 정부에 회수되면 산업이든 시설이든 주민이든, 다 물갈이될 거라는 얘기였죠.
제시카가 발끈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심드렁합니다. "관심 없어."
그날 밤 은행에서 홀로 야근하던 실비아는, 메인 전원 스위치가 정문에서 정확히 100걸음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겨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매일 똑같이 걸어 귀가하며 걸음 수를 세는 버릇이 있었거든요. "그럴 리가…… 말이 안 되잖아." 스스로도 믿기 싫은 의심이었죠.
5. 베니, 데이비스 타운을 떠나기로 하다
리온, 헬레나, 우드로, 마일스, 제시카가 오랜만에 다 같이 저녁을 먹어요. 마을을 향한 옛 연가를 다 같이 흥얼거리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에요. 그런데 베니가 조용히 손을 들어요.
"나, 떠날 거야." 장학금을 받아 아이언포지 시티의 학교로 간다는 선언이었어요. 리온은 "괜찮아…… 좋은 일이야……"를 기계처럼 반복할 뿐,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해요.

떠나기 직전, 베니가 제시카에게 폭탄을 던져요. 죽은 형 칼이 블랙스틸 용병 '블랙플레이트'였다는 사실을요. 제시카는 함께한 시간이 짧았다며 얼버무리지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날 밤 은행 금고실, 실비아가 목걸이를 꼭 쥔 채 혼잣말해요. "칼…… 나 어떻게 해야 하지?" 죽은 용병과 은행 직원 사이에, 아무도 모르는 사연이 있었던 거예요.
6. 알고 보니 사장님이랑 옛 전우였다
제시카가 마침내 그 탄환을 우드로에게 전해요. 우드로가 서랍에 숨겨둔 옛 사진 속 '보스'와 클리프의 얼굴이 겹치는 순간, 그는 낮게 중얼거려요. "이름을 바꾸었군…… 네 보스가…… 그 녀석이었다니."

포로수용소에서 함께 갇혔던 동료 산크타는 결국 우드로의 품에서 죽었어요. 클리프는 구출 작전을 포기했던 사람이었고요. 우드로가 클리프의 사무실로 찾아가 "부하들을 불러들이고 주민을 내쫓는 걸 멈추라"고 요구하지만, 클리프는 "블랙스틸이 떠나도 정부가 다른 용병 회사를 보낼 뿐"이라며 물러서지 않아요.
그날 밤 섹터 동쪽 건달들이 폭동을 일으켜요. 마일스는 증기 밸브 트랩으로 침입자를 물리치고, 우드로는 올가미로 건달을 처마 밑에 매달죠.
그리고 리온의 집이 불타요. "타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앞으로 더 걱정 안 해도 되고." 리온의 씁쓸한 한마디가 남습니다.

7. '치안유지'라는 이름의 협박
은행 매니저가 리스캄에게 문서 한 장을 내밀어요. 은행·정부·블랙스틸 3자 계약서니 정당한 명령이라는 거죠.
리스캄이 거절해요. "저는 총을 쏘지 않을 거니까요. 그리고 팀원 중 아무도 총을 쏘지 못하게 할 겁니다."

은행 밖에 모인 주민들이 저항가를 불러요. "굶주림에 시달리는 건 우리, 공수표를 위해 모든 걸 바친 건 우리…… 안녕, 내 고향♪" 그 노래를 뒤로하고, 헬레나는 우드로와 조용히 춤을 춰요.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마을에서, 잠깐의 평화죠.
그런데 실비아가 서류를 정리하다 발견해요. 서명도 안 됐고 은행에 발도 들이지 않은 사람들 몫의 백지 계약서 다발을요.
몇 푼 안 되는 이자는 신경도 안 써요. 저희의 목표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이에요. 처음부터 그래 왔고요.
— 은행 매니저
8. 결국 다 같이 도둑이 되기로 했습니다
제시카가 클리프를 찾아가 따져요. "클리프 씨는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인간성을 거의 잃은 것 같아요." 클리프는 담담히 되묻죠. "인간성이라…… 용병 회사 보스한테 그런 아름다운 단어가 무슨 소용이 있나?"
결국 제시카는 스스로 걸어 나오고, 사실상 블랙스틸과 갈라서요.
실비아가 마지막 패를 꺼내요. 은행 금고에 새 이주민들을 위해 준비된 거액이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가 그 돈을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길 바라는 건가, 빼앗기길 바라는 건가?" 우드로가 정곡을 찌르자 실비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요.
헬레나가 먼저 낡은 무기를 테이블에 올려요. 20년간 개척지를 떠돌며 살아남은 사람다운 결기였죠. "당신들이 함께하기 싫다면 나 혼자 할 거야." 리온도 스패너를 꺼내 들어요.
우드로가 마지막으로 제시카에게 총을 겨누며 "떠나라"고 말려보지만, 제시카는 자기 총을 내려놓으며 답해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나날에 익숙해져 버릴 거예요. 죽더라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도 끼워주세요."
9. 은행 터는 법: 100걸음과 다이너마이트
실비아가 몇 년 치 걸음 수로 외워둔 은행 내부 구조와 비밀번호대로, 네 사람이 움직여요. 우드로와 제시카가 인질을 통제하고, 헬레나와 리온이 금고까지 문을 뚫는 역할 분담이었죠.

은행장도 매니저도 목숨이 걸리자 순순히 비밀번호를 불어요. 은행장은 우드로의 카운트다운 앞에 무너지고, 매니저는 리온을 도발하다 제시카에게 제지당하죠.
마지막 문 앞, 실비아의 안내는 간단했어요. "쉬운 보너스 문제예요 — 폭파하세요."

네 사람이 돈더미 앞에서 잠시 말을 잃어요.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돈은 처음 봐"라는 헬레나에게 리온이 답해요. "하지만 은행이 우리한테서 탈탈 털어간 돈보다는 훨씬 적네."
제시카는 그냥 신기하대요. 태어나서 이렇게 돈을 원해본 적이 없었다고요.
10. 리온, 동력로와 함께 남다
탈출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요. 우드로가 홀로 남아 블랙스틸을 막는 사이, 리온과 헬레나는 비밀통로에 폭약을 설치해요.
하나씩 붙일 때마다 리온은 환각을 봐요. 이미 떠난 베니, 전사한 칼, 그리고 자신을 두고 떠났던 어머니까지 차례로 스쳐 가요.
리온은 결국 통로를 봉쇄한 채 남기로 해요. 무전으로 필사적인 제시카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건 노래였어요. "나는 죽지 않아…… 난 영원히 여기에 있을 거거든, 그녀의 품에서 영원히 살아갈 거야……"

같은 시각, 우드로는 클리프와 총을 겨누고 서 있어요. 처음으로 그의 진짜 이름을 불러요. "루퍼트."
클리프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청해요. "넌 날 끝낼 수 있어." 하지만 우드로는 방아쇠 대신 그의 통신기를 쏴서 부숴요.
난 널 죽일 수 없어. 이 죄는 네가 책임져야 해.
— 우드로

제시카는 스코프 너머로 낯선 얼굴들을 봐요. 기도하던 소녀, 눈밭을 뛰던 여자, 화염 속에서 떠나간 남자까지 차례로 스쳐 가요.

제시카는 총알을 전부 하늘로 쏘아 올려요.
제 눈물은 그 사람들의 슬픔을 대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 총은, 그 사람들의 슬픔을 위해 울릴 거예요.
— 제시카
5년 동안 한 번이라도, 내가 그때 왜 널 선택했는지 깨달은 적 있었어? 내가 널 선택한 건 네 손에 든 총이 아니라, 네 눈물 때문이었어. 눈물은 절대 나약한 게 아니야, 제시카.
— 리스캄
제시카는 순순히 체포돼요. 프란카가 미리 데워둔 수갑을 채워주면서요. 밤이 지나고 눈이 그친 걸 깨달으며, 제시카는 리온이 부르던 노래를 나지막이 따라 불러요.
에필로그.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
클리프는 조용히 눈감아줘요. 제시카는 죄를 인정하며 감형 대신 개척지행을 자원하고, 헬레나도 무사히 몸을 피해요.
우드로에게는 새 신분과 남부의 저택을 권하지만, 그는 거절해요. "친구가 아니라 가족을 찾으러 간다."
헤어지며 클리프가 부탁해요. "내가 모르는 곳에서 죽지 마." 우드로가 답해요. "돌이킬 수 없다 해도, 다시 전화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완전히 갈라선 건 아니라는 뜻이었죠.


우드로는 제시카와 함께 개척지행 차량에 올라요. 넓은 챙 모자를 씌워주며 그가 말해요.
울고 싶으면 울어…… 새 생명은 다 울면서 태어나는 법이거든. 그게 숨을 쉬는 첫걸음이야.
— 우드로

데이비스 타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위중한 환자처럼 숨을 헐떡이며 남아 있어요. 다만 이 마을을 구한 건 은행도 정부도 아니라, 도둑이 되기로 한 네 사람이었다는 것만 다르죠.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을 다시 일으킨 건, 총이 아니라 눈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