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 아일랜드는 감염자를 치료하는, 바퀴 달린 제약회사예요. 이 함선 안에는 전장에 나가는 오퍼레이터도, 치료받으러 온 아이도,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고요.
이 이야기엔 큰 사건이 없어요. 그냥 어느 평범한 날들의 조각들이거든요.
펫을 맡기고, 옛 일기를 펼치고, 주방에서 한숨을 쉬는 사람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이 함선에 흘러든 이들이 '나는 왜 여기 있나'를 조용히 되묻는 하루예요.
동글이·뾰쪽이·까망이를 부탁했더니, 알고 보니 다 폭발하는 원석충이었어요
바닐라는 블랙스틸에서 파견돼 온 인턴 사냥꾼인데요. 며칠 뒤 선배들과 임무를 나가게 되면서, 애지중지 키우는 애완동물들을 맡길 사람이 필요해졌어요.
동글이·뾰쪽이·까망이는 원석충이고, 튼튼이는 미니 사막 메탈 크랩이에요. 박사님이 '원석'이란 말에 눈을 빛내자, 바닐라는 기겁하며 절대 애들을 먹으면 안 된다고 소리치죠. (까망이 뿔은 누르면 폭발한대요.)
다행히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요. 멜란사는 좀처럼 속을 안 드러내는 과묵한 가드고, 스튜어드는 그런 멜란사를 살뜰히 챙기는 사람이에요. 두 사람이 펫을 맡아주기로 하고요.
그 자리에 블레이즈가 치료받으러 온 아이 도라를 데리고 나타나요. 그러곤 거침없이 말하죠. 로도스 아일랜드는 공짜로 치료해 주는 곳이 아니라고.
돈을 안 받을 뿐 보상은 받는다고요. 아이들은 자라서 더 대단한 일을 할 테니 이건 '사전 투자'라고. 스튜어드는 조금 다르게 봐요. 모두가 같은 뜻일 필요는 없고, 나아가는 방향만 같으면 함께할 수 있다고요.
제 방에서 폭발하는 껍데기 뿔까지 자랑하던 바닐라는, 헤어질 무렵 이렇게 부탁해요. 다음에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 자기도 불러달라고. 종이꽃을 같이 접어보고 싶어졌다면서요.
매일 일기를 쓰는 건, 매일 잊어버리기 때문이었어요
프틸롭시스는 사일런스를 따라 라인 랩에서 온 메딕이에요.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한 장씩 다시 읽어 내려가죠.
광석병은 그녀에게서 많은 걸 앗아갔는데요. 가끔 잠에서 깨면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을 때가 있대요.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매일 일기를 써요.
오랜만의 외출에서, 프틸롭시스는 자기가 당연한 것들을 너무 많이 잊고 살았다는 걸 깨달아요. 동료들이 들려준 삶의 이야기를 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어 왔다는 것도요.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 프틸롭시스
그래서 그녀는 사일런스를 찾아가요. 늘 하던 이야기 말고, 이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나누고 싶다면서요. 소중한 사람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졌거든요.
요리하다 한숨 쉬는 걸 딱 들킨, 로도스에서 제일 깐깐한 요리사
마터호른은 쉐라그 출신의 방패 오퍼레이터이자, 함선 주방을 지키는 요리사예요. 위생이라면 아주 엄격하고요.
몰래 음식을 훔쳐 먹던 에단을 붙잡은 마터호른은, 정작 도둑질보다 '손도 안 씻고 맨손으로 먹은 것'에 더 화를 내요. 에단은 그런 마터호른을 자꾸 '아저씨'라고 부르며 놀리죠.
그날 마터호른은 내내 한숨이 잦았어요. 주인님인 실버애쉬가 잠깐 들러, 여동생 엔시아를 위한 고향 음식을 부탁하고 떠났거든요.
차에 향유를 넣어 마시는 걸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원래 주인님이었는데, 빅토리아에서 돌아온 뒤로는 한 번도 그렇게 드시질 않았어요. 어쩌면 잊으신 걸지도 모르죠. 마터호른은 그 생각을 애써 접어둬요.
그런 마터호른에게 에단은 어설픈 샌드위치를 슬쩍 쥐여주고 도망가요. '마음을 담은 답례 정도는 되겠지'라면서요. 무뚝뚝하게 받아 든 마터호른의 표정이, 벌컨 말로는 꽤 좋아 보였다네요.
이름을 찾아 세상을 떠돌던 방랑자, 도끼에 새겨진 게 자기 이름이었어요
라이타니엔에서 붙잡혀 온 한 방랑자가 있었어요. 말도 잘 안 통하고 무기를 함부로 휘두르는 통에, 다들 그저 '페로'라고만 불렀죠.
벌컨은 미노스 출신의 대장장이예요. 방랑자가 애지중지하던 낡은 도끼를 살펴보다, 손잡이에 새겨진 고대 미노스어를 읽어내죠.
그건 그녀의 이름이었어요. 케오베. 세상 누구도 읽어주지 못했던 이름을, 벌컨이 처음으로 불러준 거예요. '케오'라는 애칭까지 지어줬고요.
케오베의 소원은 소박했어요. 배부르게 먹고, 폭신한 이불에서 자고, 보물을 다 넣을 큰 방을 갖는 것. 그러려면 머리도 쓰고 나쁜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하자, 케오베는 눈을 반짝이며 답하죠. '영웅이 되라는 거지?'
벌컨은 보증인란에 자기 이름을 적어요. 인사 담당자가 왜 그런 여자를 받았느냐 묻자, 대장장이는 짧게 답하고요.
무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어.
— 벌컨
사무실이 싫어서 전투원을 골랐다가, 매일 '사서 고생'하는 사람
오키드는 도시에서 살다 온 민간인 출신 오퍼레이터예요. 사실은 사무실에 앉아 있기가 싫어서, 얼떨결에 전투원을 신청해 버렸거든요.
오키드는 어린 포푸카를 늘 마음에 걸려 해요. 벌목장에서 일하다 켈시와 안셀에게 이끌려 온 아이인데, 부모님이 '먼 곳으로 갔다'는 말만 믿고 있거든요. 그 말에 오키드는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줘요.
동야 출신의 미드나이트는 사람 마음을 잘 읽는 오퍼레이터예요. 훈련장에서 만난 오키드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죠.
한때 잘나가던 그에게는 자신을 질투한 후배가 있었어요. 후배는 그를 광석병에 감염시키기까지 했고,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칼을 겨눴죠. 미드나이트는 그 끝을 자기 손으로 매듭지어야 했고요.
그런데도 미드나이트는 담담해요. 잔혹한 세계의 진실을 봤다고 해서 꼭 그 진실에 물들 필요는 없다고. 온실 속에서 자란 걸 자책하지 말고,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 정하라고요. 오키드는 결국 전투원으로 남기로 해요. 잘 맞지도 않으면서요.
정말이지… 늘 사서 고생이라니까.
— 오키드
가장 무서운 교관이, 사실은 가장 상냥했어요
예비작전팀의 테스트 날이었어요. 도베르만은 신참들을 혹독하게 굴리기로 소문난 교관인데요. 팽과 비글이 그의 방 청소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조금 특별한 이야기가 시작돼요.
옷장에서 낡은 군번줄이 떨어져요. 앨런, 후안, 호세… 도베르만이 몸담았던 볼리바르 시절, 죽어간 전우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죠. 친하지도, 말도 몇 마디 안 섞은 사이였지만, 그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대요.
자치 정부의 대령이었다가 저항군을 거쳐 흘러온 그는, 병사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생각을 포기한 병사가 가장 훌륭한 병사라고. 하지만 그건 잔인한 일이고, 답은 하나뿐이라고요. 병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정확한 명령'을 내려주는 것.
볼리바르 어디에서도 그걸 본 적이 없던 도베르만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처음으로 그걸 봤다고 해요.
이곳은 이상주의자들이 작은 소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유토피아니까.
— 도베르만
테스트에 그 얘기를 그대로 답하면 0점이라며 짓궂게 웃던 도베르만은, 아이들이 떠난 방에서 세 이름을 다시 읊조려요. 앨런, 후안, 호세. 새 미래를 찾았어도 자기 뿌리는 여전히 볼리바르에 있다고. 언젠가는 돌아가 봐야겠다고요.
다른 문으로 들어와, 같은 방향을 보다
펫을 맡긴 사냥꾼, 일기를 다시 쓴 메딕, 이름을 얻은 방랑자, 얼떨결에 남은 민간인, 그리고 뿌리를 잊지 않은 교관. 이들이 로도스 아일랜드에 흘러든 이유는 제각각이었어요.
돈 때문에, 치료 때문에, 사무실이 싫어서, 그저 이름을 찾으려고. 그런데도 어느 날 문득, 다들 '조금 더 여기 있어 볼까' 하고 마음을 돌리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요.
큰 사건은 없었어요. 그냥 펫에게 밥을 주고, 일기를 쓰고, 한 끼를 차리고, 종이꽃을 접는 평범한 하루였을 뿐이죠. 그 작은 조각들이 모여, 이 바퀴 달린 함선을 오늘도 조금씩 앞으로 밀고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