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라는 대지에는 나라마다 다른 사연이 흐르는데요. 이번 기록은 하나로 이어지는 커다란 사건이 아니에요.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짧은 이야기 여섯 편이거든요.
누군가는 고향을 떠나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그냥 지나가려고 했어요. 근데 이상하게도 다들 걸음을 멈추고, 누군가의 손을 붙잡아버려요.
여섯 사람이 저마다 찾고 있던 건, 결국 '내가 있어도 되는 곳'이었는지도 몰라요.
가축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협곡에서 한 달만 버티면 됩니다
일라는 우르수스를 떠나 황무지로 향하는 전(前) 리유니온 전사예요. 전우 가레스와 함께, 잔학한 폭도라 소문난 '녹슨 망치'라는 조직을 찾아 걷고 있었어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가레스는 말해요. 예전에 군에 있을 때 봤거든요. 카시미어로 넘어간 우르수스 부대가, 광산의 감염자들을 풀어주고 우르수스의 흔적을 전부 부수며 미쳐 돌진해 오던 그 무리에게 전멸당하는 걸요.
산꼭대기에 거꾸로 꽂힌 녹슨 망치. 그걸 지키던 사내는 두 사람에게 삽과 곡괭이를 던져줘요. 저 협곡에서 한 달을 살아남으라고. 그게 '녹슨 망치'에 들어오는 조건이라고요.
버든비스트를 사냥하고, 뼛가루를 뿌려 보리를 심고, 물을 찾아 헤매던 한 달. 그런데 물을 찾던 길에서 우르수스군의 군화 자국을 발견해요. 가레스를 잡으러 온 로모노 대령의 추격대였죠.
가레스는 짐을 챙겨 도망치자고 해요. 하지만 일라는 이번엔 움직이지 않아요.
오늘은 도망가지 않을 거야. 죽어도 이 협곡에서 죽을 거야. 여기 있는 모든 게 나의 전부이자, 우리의 피와 땀이고, 여기가 우리의 새집이야.
— 일라
그 각오를 지켜본 건 우르수스군만이 아니었어요. 매일 두 사람의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러 오던 '녹슨 망치' 전사가, 그제야 합격을 선언해요.
협곡 양쪽 벼랑에 황야의 전사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스물네 명의 우르수스 병사를 에워싸요. 함께 싸우자는 일라에게 전사는 답해요. 우린 싸우지 않는다고, 부술 뿐이라고. 쇠붙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협곡을 뒤흔들었어요.
죽어가는 걸 구해줬더니, 눈 뜨자마자 무기부터 휘두른 손님
이번엔 저 멀리 미노스예요. 사르곤과 전쟁 중인 이 땅에서, 헤비레인은 국경 근처에 쓰러진 채 발견돼요. 사르곤에서 넘어온 젊은 쿠란타 용병이었죠.
그녀를 거둔 건 팔라스, 미노스 마을들이 '여신'이라 부르는 제사장이에요. 곁을 지키던 살카즈 용병은 스파이일지 모른다며 경계했지만, 팔라스는 위험이 없는 이상 생명을 포기할 순 없다며 치료를 고집해요.
눈을 뜬 헤비레인은 무기부터 휘둘러요. 좁은 천막이 그 손짓을 막았지만요. 팔라스는 오히려 자기 무기를 내려놓아요. 새 흠집 하나 없는 그 무기를 보면, 당신은 최근 싸운 적이 없다고.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요.
헤비레인은 목적지도 없이 그저 멀리 가고 싶어 해요. 황야도, 전쟁터도, 사르곤도, 지금은 아무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팔라스는 멀쩡한 나침반 하나를 쥐여주며 그녀를 위해 기도해요.
우리 모두 끝없는 여정을 걷고 있고,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마주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는 것입니다.
— 팔라스
그날 밤, 헤비레인의 뒤를 쫓던 살카즈 킬러가 팔라스를 노려요. 그 앞을 막아선 건 살카즈 용병이었죠. 어둠 속 전투는 후세에 기록되지 않았어요. 다만 헤비레인의 여정은 계속됐고, 그 영혼의 빛은 언젠가 로도스 아일랜드로 흘러들 거예요.
언니를 놀래주려던 꼬마, 알고 보니 자기가 더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
장면이 확 바뀌어, 로도스 아일랜드 휴게실이에요. 베나가 인형 애니를 찾다가, TV 앞에서 게임에 열중한 키라라를 발견해요. 호러 게임을 좋아하지만, 낯은 지독하게 가리는 오퍼레이터죠.
같이 놀자고 조르는 베나 때문에 키라라는 진땀을 빼요. 연령 등급을 걱정하며 출혈 이펙트부터 끄고요. 그래도 둘은 히든 보스를 함께 쓰러뜨리고, 키라라는 신아키시 괴담이며 트루 엔딩을 신나게 설명해줘요. 괴담은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힘을 잃는다고요.
답례라며 베나가 들려준 건 빅토리아의 오래된 괴담이에요. 비 오는 날 고아를 데려가는 노파, 아이만 한 인형 '애니',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 이야기.
키라라가 잔뜩 겁먹은 순간, 인형 애니가 조용히 입을 열어 인사를 건네요. 베나의 짓궂은 연극이었죠. 그런데 그 무서운 옛이야기 속 아이가 꼭 베나 자신 같았다는 여운만은, 웃음 뒤에 조용히 남아요.
누군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준 적이 별로 없었거든.
— 키라라
불이 꺼진 지 수십 년, 아무도 안 오는 등대를 아직도 지키는 사람
이베리아 이북, 바다의 재앙으로 무너진 해안 도시예요. 블루포이즌과 글라우쿠스가 폐허가 된 건물을 조사하러 지하로 내려가요. 독을 다루는 오퍼레이터와, 이베리아 출신 엔지니어죠.
안쪽엔 해초에 묶여 익사한 바운티 헌터의 시체가 있었어요. 이곳이 바닷물에 두 번 잠겼던 흔적이었죠.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에기르인과 독극물, 그리고 입에 담을 수 없는 그 재앙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눠요.
더 깊은 곳에서 하얀빛이 일렁여요. 블루포이즌의 화살에 붙잡힌 건, 길 잃은 이베리아 캐스터 아리아였어요. 이 건물이 사실은 등대라고, 그녀가 알려줘요.
아리아는 등대지기 견습생이에요. 재앙 뒤로 다시는 불을 밝히지 못한 등대를, 선생님과 함께 여전히 지키고 있다고 해요. 바다에 오가는 배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요.
우리가 만든 빛은 겨우 작은 구석 정도만 비출 수 있을 뿐이에요. 바다에 왕래하는 배도 사라진 지 오래됐지만, 우린 여전히 등대를 지키고 있어요.
— 아리아
글라우쿠스가 부서진 에너지 코어를 로도스로 가져가 연구해보자 하고, 아리아도 합류하기로 마음먹어요. 그러다 뒤늦게 블루포이즌의 신경독에 반응해 픽 쓰러졌지만, 금세 다시 깨어나죠. 이 등대는 어쩌면, 해안을 지키는 로도스의 새 거점이 될지도 몰라요.
귀족 도시가 지겨워 산책 나갔다가, 도망친 감염자를 주웠습니다
라이타니엔이에요. 카넬리안은 히아신스 백작을 대신해 협력 회담차 이곳에 온, 사르곤 출신 시종이에요. 이종족인 그녀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았죠.
화려한 시내가 지겨워 외곽으로 걷다가, 위병들에게 쫓기는 감염된 소녀를 도와줘요. 소녀의 사연은 이랬어요. 채굴장 마을에서 부모가 갱도 붕괴로 돌아오지 않았고, 위병들이 마을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고요.
뒤이어 나타난 라이타니엔 캐스터를, 카넬리안이 매섭게 몰아붙여요. 위치킹이 남긴 어둠의 잔재처럼 감염자를 노예로 부리는 아츠를 캐물으면서요. 캐스터는 소녀를 넘기고 물러나요.
카넬리안은 소녀를 근처에 숨어 있던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에게 맡겨요. 소녀는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을 찾아, 언젠가 원수도 갚겠다며 떠날 준비를 해요.
네가 지금의 신념을 계속 가지고 있는 한,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카넬리안
타향에 맞춰 자신을 다듬긴 해도, 굳이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이단아로 남는 편이 낫다고, 자기 자신다우면 되는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요.
언니한테 편지 한 장 부치려고, 몰래 설산까지 올라간 아가씨
마지막은 다시 로도스 아일랜드예요. 클리프하트는 실버애쉬 가문의 막내이자 산악인 오퍼레이터인데요. 성산으로 떠나 성녀가 된 언니 엔야에게, 편지 한 장을 전하고 싶어 해요.
가문의 부하 쿠리어에게 부탁하지만, 지금 쉐라그 상황이 복잡해 만주원이 성녀와의 접촉을 엄격히 막고 있어요. 편지가 닿기 어렵다는 말에, 클리프하트는 포기하는 척해요.
그러곤 몰래 설산 장비를 챙겨 혼자 산으로 향해요. 눈치챈 쿠리어가 뒤늦게 따라잡아 그녀를 말리죠. 왜 이렇게까지 위험한 짓을 하냐고요.
클리프하트는 답해요. 오빠 엔시오데스와 언니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는 걸, 더는 못 본 척할 수 없다고요.
가족끼리도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면, 심지어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는 날이라도 오게 된다면, 그땐 어떡할 건데!?
— 클리프하트
결국 쿠리어가 두 손 들고, 편지를 대신 전하기로 해요. 수도원까지가 한계라 성녀가 받을 수 있을진 장담 못 하지만요. 그리고 얼마 뒤, 쿠리어는 어딘가 무거운 얼굴로 돌아와요. 이번엔 실버애쉬가 클리프하트에게 전해달라 부탁한 물건이 있다면서요.
있을 곳을 찾는다는 것
황무지, 미노스, 휴게실, 등대, 귀족의 도시, 설산. 무대는 다 달랐지만 여섯 사람은 사실 같은 일을 하고 있었어요. 도망치다가도 멈춰 서서 누군가를 지키고, 낯선 손을 붙잡는 일 말이에요.
아리아는 등대의 코어를 안고 로도스 아일랜드로 향했고, 불 꺼진 등대는 다시 해안을 지키는 거점이 될지도 몰라요. 헤비레인의 여정도, 언젠가는 그 빛을 향해 흘러갈 거고요.
나라도, 사연도 다 다른 여섯 사람. 그런데도 다들 결국 같은 걸 찾고 있었어요. 내가 있어도 되는 곳, 그리고 그 곁에 있어 줄 누군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