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의 북쪽 끝, 우르수스 제국. 이곳에서 감염자는 병자가 아니라 짐승 취급을 받아요. 감시팀이 그들을 색출해 광산으로, 죽음으로 내몰죠.
그 억압에 맞서 감염자들이 뭉친 무장 조직이 리유니온이에요. 한때 리유니온은 우르수스의 거대 이동도시 체르노보그를 통째로 집어삼켰죠.
이야기는 그 리유니온이 무너진 뒤에서 시작해요. 로도스 아일랜드가 불타는 체르노보그 코어로 들어가, 리유니온의 리더 탈룰라를 마주하러 가는 길이요.
그리고 한편에선, 부치지 못한 편지 한 통이 읽혀요. 받는 사람은 '훼이지에', 보내는 사람은 탈룰라. 그 편지 속에서 탈룰라는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를 털어놔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두 개의 시간을 나란히 오가요. 눈밭에서 시작된 한 소녀의 지난날과, 불길 속에서 그 소녀를 마주하러 가는 지금을요.

1. 눈밭에서 주운 아이
몇 년 전, 우르수스의 작은 마을. 늙은 부부가 눈밭에 쓰러져 있던 소녀 하나를 딸처럼 거둬요. 피투성이로 나타난 그 아이의 이름은 탈룰라예요.
부부는 탈룰라가 감염자란 걸 진작 알면서도 감싸줬어요. 할아버지 역시 광산에서 광석병에 걸린 감염자였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감시팀이 마을을 덮쳐요. 탈룰라가 대원 하나를 혼내주자, 마을 전체가 보복의 표적이 되죠.
할아버지는 탈룰라 대신 스스로 감염자라 자백하며 감시팀에게 끌려가요. 손목을 그어, 안개처럼 흩어지는 피로 자신이 감염자임을 증명하면서요.

탈룰라가 감시팀을 불태우고 돌아왔을 때, 마을을 밀고한 게 다름 아닌 할아버지 자신이었단 걸 알게 돼요. 수색을 멈추게 하려고 스스로를 내던진 거였죠.
그리고 그날, 마을의 또 다른 감염자 알리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혀요. "나도 감염자야"라고요.
2. 검은 뱀의 딸
탈룰라가 알리나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줘요. 그녀는 원래 우르수스의 어느 공작, 카셰이의 손에 '후계자'로 길러진 아이였어요.
카셰이는 겉으로는 자애로운 통치자였지만, 속으로는 불평등과 공포로 사람을 길들이는 괴물이었죠. 탈룰라에게 살육과 음모, 지배의 기술을 가르쳤어요.
어느 날 탈룰라는 카셰이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 팔에 오리지늄을 박아넣어 감염자가 돼요. 후계자가 될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요.
카셰이는 분노하는 대신 기묘한 '내기'를 걸어요. 자신이 가르친 지혜와 원한이 언젠가 탈룰라를 자신과 똑같이 만들 거라고, 그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요.
탈룰라, 잊지 말거라. 네 끝은 결국 나라는 걸.
— 카셰이
탈룰라는 그 자리에서 카셰이를 검으로 찔러 죽여요. 하지만 카셰이가 심어둔 오리지늄 아츠의 씨앗은, 그녀 안에서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죠.

3.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다"
카셰이를 떠난 탈룰라는 정처 없이 걷다 노부부의 마을에 이르렀고, 거기서 알리나를 만났어요. 그때부터 그녀의 진짜 여정이 시작돼요.
탈룰라는 쫓기고 굶주린 감염자들을 하나둘 거둬요. 감염자에게는 힘을 합쳐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거점이, 그리고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믿었죠.
그녀의 메시지는 단순했어요. 다른 도시의 감염자가 세운 조직 '리유니온'의 신념과도 같은 한마디였죠.
당신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 탈룰라
알리나는 감염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됐어요. 싸움이 아니라 지식으로, 채소와 과일과 이야기책으로 사람을 지키는 방식으로요.
4. 눈의 악마와 웬디고
탈룰라는 툰드라의 전설적인 감염자 유격대를 찾아 나서요. 그 문 앞을 지키던 건 얼음의 캐스터, 눈의 악마 소대장 프로스트노바였죠.
탈룰라는 프로스트노바의 얼음을 자신의 불로 녹여 보이며 신뢰를 얻어요.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인정하는 전우가 돼요.
유격대의 진짜 주인은 거대한 살카즈 전사, 패트리어트예요. 우르수스 제국조차 잊지 못하는 전설, '웬디고'라 불리는 존재죠.
패트리어트는 탈룰라의 남하 계획을 헛된 공상이라 여기며 번번이 반대해요. 그러면서도 그녀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죠.
운명이 날 비웃으면, 기필코 불태워 버릴 거야.
— 탈룰라

그러던 어느 날, 우르수스 황제의 근위병들이 탈룰라 앞에 나타나요. 얼굴을 베어 이름 없는 시체를 만든다는 '데몬', 제국의 암살 부대죠.
그들은 탈룰라가 카셰이의 딸임을 알아채고, 감염자를 앞세워 우르수스의 옛 영광을 되살리자며 패트리어트까지 회유하려 해요. 함께 세상을 정복하자면서요.
패트리어트는 단칼에 거절해요. 자신은 제국의 배신자이며, 지금 자신이 따르는 지휘관은 황제가 아니라 탈룰라라고요.
이 여자의 이념이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패트리어트

5. 만남은, 이별을 위해
부대는 남쪽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요. 알리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탈룰라는 감염자를 모으고, 프로스트노바는 노래로 아이들을 재우고요. 짧지만 따뜻한 나날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물자를 바꾸러 마을에 다녀오던 알리나가 감시팀의 손에 목숨을 잃어요.
탈룰라는 피투성이가 된 알리나를 업고 끝없는 설원을 걸어요. 가볍고 작은 몸이, 마치 대지처럼 무겁게 느껴졌어요.
알리나는 마지막 숨으로 당부해요. 절대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고. 미워해야 할 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우르수스와 이런 세상이라고요.
만남은…… 이별을 위해 존재하는걸.
— 알리나
알리나가 눈을 감은 뒤의 일을, 탈룰라는 기억하지 못해요. 그저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눈 덮인 나무들이 소리 없이 타올랐을 뿐이에요.

6. 불타는 코어로
이제 현재. 리유니온은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졌어요. 살카즈 용병은 감염자를 학살하고, 우르수스 정규군은 리유니온 제복을 입은 채 잠입해 있죠. 탈룰라가 스스로 리유니온을 이곳에서 소멸시키려 한 거예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켈시의 지휘 아래 체르노보그 코어로 들어가요. 도시가 용문의 함포 사정거리에 닿기 전에, 이 거대한 쇳덩어리를 멈춰야 하거든요.
아미야와 로즈몬티스는 사령탑을 향해 싸워요. 도중에 패트리어트를 따르던 유격대 방패병들과 손을 잡죠. 서로가 서로의 동료를 죽인 사이인데도, 더 큰 목표 앞에서요.
로즈몬티스는 파괴의 아츠에 삼켜질 뻔하지만, 팀원들과 아미야의 손을 붙잡고 버텨요. 무기도 병사도 아닌, 한 사람의 '전사'로 서기 위해서요.
방패병은 아미야에게 복수와 증오를 자꾸 부추겨요. 너희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미워하라고, 증오야말로 자신들을 움직이는 힘이라고요.
하지만 아미야는 흔들리지 않아요. 감염자가 받은 부당함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증오의 연료로 삼는 건 다르다고요. 우린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고, 필요한 희생 따윈 없다고 잘라 말해요.
7. 의사의 선택
코어 깊은 곳에서 켈시는 끔찍한 광경을 마주해요. 석관 속에서 변이한 감염자가,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하얀 생물이 되어 오리지늄 가루를 퍼뜨리고 있었거든요.
그 가루는 일반인마저 감염시키는 대규모 재앙의 씨앗이었어요. 켈시는 의사로서, 그 생물을 멈추기로 결정해요.
체르노보그의 코어는 원래 오래전 발굴된 정체 모를 설비였어요. 켈시가 한때 가르친 우르수스 과학자들이 그 힘을 밝혀냈지만, 군부의 탐욕과 협박 속에 하나둘 석관에서 스러졌죠. 켈시는 그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오래 짊어져 왔어요.
그 하얀 생물은 죽어가면서도 노래를 불러요. 살아 있는 건 좋은 거라고, 힘들어도 곁에 함께 가줄 친구가 있다고, 사람들에게 꼭 전해달라고요.
그리고 켈시는 박사에게 오래 감춰온 진실을 꺼내요. 3년 전 이 석관은 박사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고, 한때 박사의 몸을 쓰던 존재가 켈시의 벗 테레시아를 죽였다는 사실을요.
켈시는 박사를 지키겠다는 약속과, 박사를 향한 지울 수 없는 분노 사이에서 흔들려요. 그럼에도 답은 박사 스스로 찾아야 한다며, 판단을 미뤄두죠.

8. 두 자매
사령탑 꼭대기에선 이미 한 사람이 탈룰라와 맞서고 있었어요. 용문 근위국의 경관, 첸이에요. 검 '적소'를 든 채로요.
첸과 탈룰라는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사이예요. 20년 전 그 비 오던 밤, 겁에 질려 손을 놓아버린 첸을 두고, 탈룰라는 홀로 카셰이에게 끌려갔죠.
그날 이후 첸은 언니를 다시 찾겠다는 한 가지 목표로 살아왔어요. 빅토리아에서 검술을 익히고, 용문으로 돌아와 경관이 되어, 10년 전 실종된 소녀의 행방을 쫓았죠.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친 건, 다름 아닌 카셰이를 용문에서 몰아낸 웨이 옌우였어요. 어릴 적 첸에게 "잘못을 바로잡는 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 일러준 사람이죠.
아미야가 첸의 칼집에 남은 기억을 읽고 합류해요. 그리고 탈룰라의 감정을 들여다본 순간, 소름 끼치는 사실을 깨달아요. 눈앞의 탈룰라 안에서 말하고 있는 건, 죽었어야 할 카셰이라는 걸요.
첸은 언니의 결백을 증명하러 온 게 아니라고 못박아요.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음모라면, 그게 제 혈육의 것이라 해도 검으로 막겠다고요. 그러려고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여기까지 온 거라면서요.
카셰이의 저주는 탈룰라를 완전히 집어삼키려 했어요. 탈룰라 스스로 첸을 죽이게 만들어, 마지막 남은 그녀 자신마저 지우려 했던 거죠.

9. 분노할 권리
가면을 벗은 카셰이는 스스로를 '불사의 검은 뱀'이라 밝혀요. 천 년 동안 우르수스의 모든 것을 지켜봤다는, 죽지 않는 존재요.
그는 자신이 우르수스의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해요. 강하든 약하든, 선하든 악하든 전부 다요. 그래서 전쟁으로 사람들을 단련시키고, 감염자에게 존엄을 되찾아주겠다고요. 눈앞의 작은 희생 따윈 백 년 뒤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요.
탈룰라의 불꽃은 아미야와 첸을 통째로 삼킬 만큼 뜨거웠어요. 산소마저 태워버리는 그 불 속에서, 아미야는 눈을 감고 수많은 이의 기억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 기억 끝에서, 배신당하고 학살당한 어느 살카즈 군왕의 분노를 만나요. 복수도 원한도 아닌, 오직 부당함을 향한 순수한 분노를요.
복수하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내게는 영원히 분노할 권리가 있다!
— 살카즈 군왕
증오는 원한을 없애지 못하지만, 분노는 달랐어요. 첸의 검술과 그 분노가 아미야의 손안에서 하나로 엮여, 적소를 꼭 닮은 푸른 검이 돼요.
그 검이 마침내 탈룰라의 불길을 갈라요. 아츠조차 벨 수 있는, 오랜 세대의 분노가 담긴 칼날이었죠.

10. "난 불이니까"
아미야와 첸은 탈룰라를 죽이지 않아요. 심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면서, 결과가 아니라 책임을 위해 그녀를 붙잡으려 하죠.
불러낸 기억이 탈룰라의 머릿속을 충분히 맴돌자, 마침내 그녀 자신이 카셰이에게 반기를 들어요. 죽어서도 고개 숙이지 않는 동료를 비웃는 검은 뱀을 향해서요.
당신은 씨앗이자 덩굴이고, 커다란 나무이기도 해. 하지만 상관없어, 카셰이. 난 불이니까.
— 탈룰라
탈룰라는 카셰이를 자신의 안에서 몰아내요. 대지와 설원, 빛을 좇던 동료들이 자신을 가르쳤을 뿐, 검은 뱀은 결코 자신이 아니라고요.
그때 전쟁 상인 W가 나타나 코어를 멈출 열쇠를 찾아요. 카셰이는 마지막까지 탈룰라를 꼬드겨 그 열쇠를 부수게 하려 했지만 실패했어요. 탈룰라에겐 아츠로도 지울 수 없는 양심이 남아 있었거든요.
탈룰라가 건넨 열쇠로 W가 암호를 입력해요. 체르노보그는 못마땅한 굉음을 내며, 용문의 함포 사정거리 바로 바깥에서 멈춰서요.
W는 도시를 멈추려 소년 미샤를 해쳤던 자신의 실수를 후회해요. 카셰이의 속임수에 자신도, 패트리어트도, 프로스트노바도 모두 놀아났다는 걸 뒤늦게 안 거죠.
싸움이 끝나자 W는 살아남은 살카즈 용병들에게 '자유'를 건네요. 이제 누군가의 살인병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살라면서요.

11. 결말, 또는 시작
체르노보그 사태는 '감염자가 일으킨 사고'로 조용히 봉인돼요. 우르수스도 용문도, 진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탈룰라를 데려가요. 복수를 원하는 방패병에게도, 우르수스에도 용문에도 넘기지 않아요. 감염자를 공정하게 심판할 곳이 아직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에요.
탈룰라는 죽지 않기로 해요. 자신이 죽으면 카셰이의 뜻대로 될 뿐이고, 자신만이 기억하는 이름들이 함께 사라질 테니까요. 언젠가 그들을 위해 죽을 자격이 생길 때까지, 살아가기로요.
불길 속에서 마지막까지 눈물을 참아낸 아미야는, 켈시의 손에 겨우 목숨을 건져요. 그리고 무너지듯 울어요.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눈물을요.
체르노보그에서 스러진 로도스 아일랜드 오퍼레이터는 마흔한 명. 켈시는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결코 잊지 않겠다 새겨요.
로도스 아일랜드는 결과를 위해 이 일에 뛰어든 게 아니에요. 생명의 가치가 단지 살아남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믿기에, 이 세상이 받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나아갈 뿐이죠.
첸은 용문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감염자와 일반인을 함께 공정하게 심판할 곳을 세우겠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서요. 그건 꿈이 아니라 책임이라면서요.
죽어간 리유니온의 대원들이 남긴 불씨도 꺼지지 않아요. 감염자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거라 믿는 이들이, 흩어진 자리마다 그 불을 이어가거든요.
그 사이 조용한 후일담 하나. 새로 만든 감염자용 상비약에는 이런 이름이 붙어요. '프로스트노바'라고요.

편지 속 탈룰라는 늘 같은 말로 끝을 맺어요. 눈은 녹지 않고, 봄은 오지 않을 것 같다고요. 그래도 겨울을 나기 전까진, 자신의 불이 꺼지지 않을 거라고요.
버려진 소녀는 검은 뱀의 저주를 짊어진 채, 얼어붙은 대륙의 모든 감염자에게 혼자가 아니라 말하려다 스스로를 태웠어요.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다만 분노할 권리만을 쥔 채로요.
그리고 불타버린 도시의 끝, 재와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기억을 잃은 박사를 향해 아미야가 손을 내밀어요. 그 손을, 이번엔 아무도 놓지 않도록요.
어서 오세요, 박사님.
— 아미야
